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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역사(한국사)

고조선 시대 배경, 국가 모습, 결말과 문제

by 한국 역사(한국사) 2024. 3. 21.

고조선 시대 배경, 국가 모습, 결말과 문제

고조선 시대로는 고대의 기록은 많이 남아있지 않으나 유추하는 정도의 수준으로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다. 기록에 따라 사실은 명확하지만 관련된 자료가 적고 추상적이다. 유물이나 유적등이 발견되지 않아 많은 논란이 있다.

배경

건국연대인 기원전 2333년을 한국사의 시작으로 비롯되었으며 흔히 한국사를 반만년의 유구한 역사라고 말한다. 훗날 이성계가 세운 조선 왕조와 구분하기 위하여 고조선이라고 부르고 있다. 선조들이 어떻게 인식했는지에 대한 각 시기별 역사의식을 반영한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지만 역사 자체에는 실질적인 의미가 없다. 스스로를 왕이라 칭하고 종교와 정치를 함께 지배한다는 뜻으로 단군왕검이 고조선을 세웠다. 건국 과정에서 하늘의 자손임을 내세워 하느님을 믿는 환웅 부족과 곰을 숭상하는 부족이 연합하여 주변으로 중심 세력을 확대하였다. 단군 이야기는 시조 신화로 널리 알려져 전승되어 기록으로 남겨진 것을 보아 역사가 매우 오래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한다는 홍익인간이라는 건국이념은 한국인들이 고난과 역경을 당할 때마다 자긍심을 일깨워 주는 큰 원동력이 되었다. 후기에는 박사, 경, 대부, 상, 대신, 장군 등의 관직 명칭이 나타나 있다. 그 구체적인 성격은 분명하지 않지만 당시의 중앙 통치 기구의 구성은 분명하였고, 얼마나 많은 발전이 이루어졌는지 알 수 있다. 하지만 지방 세력이 독자적인 정치권력과 군사력을 갖고 있었다. 영토는 한반도까지 아우르고 있었다. 문화와 정치적인 영향으로 발달된 국가로 성장하여 갔다. 당시 사회는 사유 재산의 기준으로 빈부격차가 생기자 이미 계급 분화가 진행되고 있었다. 신분제 사회였고 권력층의 사회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8조법과 같은 법률을 만들었다. 8 조법 중 현재까지도 전해지는 3개의 조항에서 개인의 생명과 노비의 존재 그리고 사유 재산을 소중하게 여기는 것에 대한 보호 조치를 볼 수 있다. 이후 풍속이 점차 각박해지면서 8조에 불과하던 법은 60조로 늘어나게 되었다.

국가 모습

계급 분화를 지배층의 무덤에서 발견된 유물들로 사실과 같이 보여준다. 지상에 무덤방을 꾸리고 덮개돌을 덮는 형식으로 마치 그 모습이 책상처럼 생겨 탁자식이라고 하며 북방식의 대표작으로 강화지석묘가 있다. 전라도와 경상도 등 한강 이남 지역에는 지하에 무덤방을 꾸리고 덮개돌과 돌방 사이에 3~4개 이상의 받침돌을 두어 바둑판처럼 생긴 남방식 고인돌이 있다. 불특정 다수의 소규모 지역 집단의 집합체로 지역에 따라 정착하지 않고 도읍지는 여러 차례 이동하였다. 기원전 3세기말 중국의 혼란한 상황으로 많은 유목민들이 고조선으로 넘어오면서 나라가 더욱 커졌다. 철기 무기로 주변 나라들을 정복하며 영토를 더욱 넓혀 나갔으며 더욱 강한 나라가 되었다. 또한 중국과 가까운 지리적 이점을 활용해 한반도 세력과 남쪽의 나라들 사이에 자리 잡고 있는 지리적 특성을 이용해 경제적 이익을 얻었다. 중국의 교역을 중개하면서 이를 독점하려고 하였다. 반드시 거치도록 하여 중국과 한반도 남쪽의 나라들이 무역을 하게 한 것이다. 다른 주변국들의 중간에서 수수료를 받기도 하며, 물건을 팔면서 이익을 많이 남겼다. 이는 중국의 대립을 격화시켰고 중국은 다른 나라 간의 교역을 막지 말라는 경고를 하기도 했지만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중국 북쪽에서 생활하던 유목 민족인 흉노와 손을 잡고 세력을 키워나갔다. 그러자 중국은 이러한 태도에 몹시 당황하였고 더 성장하기 전에 먼저 공격해야겠다고 생각하였다. 바다에서 7천여 명, 육지에서는 5만여 명에 달하는 군사의 수가 어마어마한 대규모 수군과 육군을 동원하여 침공하였다. 고조선의 군대는 수적으로 부족했지만 기습 공격을 펼치기도 하며 한에 맞서 열심히 싸웠고 승리한 이후에도 중국은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 중국은 약 1년간 끈질기게 침략하고 공격하였다. 

결말과 문제

중국의 긴 싸움에 사람들도 점점 지쳐가기 시작했다. 이를 눈치챈 중국은 사람들에게 항복하면 높은 벼슬과 재산을 내리겠다며 설득하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우거왕과 그의 충직한 신하 장군은 한에 맞서 끝까지 싸우려 하였다. 하지만 중국으로 마음이 돌아선 사람들이 우거왕을 죽이고 중국에 항복하였다. 장군은 사람들을 모아서 끝까지 왕검성을 지켜내고자 하였다. 그러자 중국은 이번에는 장군을 죽이고 중국으로 넘어오면 잘 대해 주겠다면서 우거왕의 아들을 매수하였다. 결국 우거왕의 아들은 장군을 죽이고 중국에 항복하였다. 이처럼 전쟁 초기에 대승을 거두었고 완강히 저항했으나 1년간의 전쟁 끝에 수도 왕검성이 함락되었고 기원전 108년에 멸망하였다. 고대 초기 국가로서 큰 역할을 하였다. 그 증거로 청동기, 철기로 만든 다양한 생활 도구 및 무기 등으로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청동기와 철기의 기술을 바탕으로 성장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현재로는 고조선에 대한 고고학적 연구가 미흡하다. 정확하게 보면 단군조선의 실체가 부정확하다고 보고 있다. 단군은 실체가 아닌 신화 속 인물로 실증적인 관점에서 보면 토착 조선왕조였다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하다는 것이다. 명확한 개념 규정이 어려워 올바른 인식과 역사의 시기와 범위 등 여러 부분에서 문제가 된다. 때문에 사서에 의한 기록들과 함께 현재까지 발견된 유적지 및 유물 등을 다양한 방면과 시각을 통해 더욱 연구에 힘써야 할 필요가 있다. 역사에 대한 연구는 아직 본래의 시점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좀 더 발전적인 이해를 얻기 위해서는 고대 문화에 대한 폭넓은 이해가 요구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