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구려 시대의 고려인은 한국인 전통의 뿌리 중 하나이다. 주요 난방 방식은 온돌이었고 오늘날 현악기의 기원으로 추정하는 자료가 있다. 한반도 남부 지역의 동일한 풍속과 언어에 대한 기록이 있다.
건국 일화 및 정치
한국의 고대 왕조 중 하나이며, 원래 이름은 해주몽으로 부여의 시조 고주몽이 졸본 지역에서 나라를 세웠다. 나라가 시작된 것은 부여의 분열과 어지러운 상황 속에서 고주몽이 남하하여 건국한 이후부터이다. 외조부는 강을 다스리는 신 하백이며 그의 세 딸 중 하유화가 고주몽의 어머니이다. 주몽이라는 이름은 활을 잘 쏘는 사람인 신성한 궁을 의미한다. 고주몽은 어릴 때부터 활로 파리를 쏘아 맞힐 정도로 재능을 타고났다고 전해진다. 일곱 아들 중에 한명이며 나머지 형제들이 그의 재능을 질투하여 죽이려고 하였다는 일화가 있다. 활발한 정복 전쟁을 통해 한반도와 북부 지역에서 크게 번성하였다. 고대 중국과 한국 사이의 격차를 극복하는데 중심적인 역할을 한 큰 축이 되었다. 부족 연맹체적인 지배 체제에서 벗어나 고대 국가로서 갖추게 된 것은 훗날 소수림왕 때에 대체로 율령 정치가 시작되는 것이었다. 고대 국가로 더욱 정비된 것은 수도를 평양으로 옮긴 이후의 일이라고 여겨진다. 중심 세력은 본래 5 부족인 소노, 절노, 순노, 관노, 계류로 형성되었다고 한다. 부족 연맹장은 왕이 되었다. 계류부는 내부, 소노부는 서부, 절노부는 북부, 순노부는 동부, 관노부는 남부라 하였다. 5부 밑에는 성이 있었다. 부에는 욕살이라는 군관과 처려근지라는 행정관이 파견되었고 이들은 각 부 내의 여러 성주를 통솔하였다. 또한 평양으로의 수도 이전 이후 평양외에 국내성과 한성의 수도가 분리되어 삼국이 완성되어 성과 같은 거점 도시가 설치되었다.
경제, 문화
통치 질서와 사회 기강을 유지하기 위해 형법을 시행하였는데 매우 엄격하였다. 반역자는 기둥에 묶어서 화형에 처한 다음 다시 목을 베었고 그 가족을 노비로 삼았다. 도둑은 12배를 변상하게 하였으며 이 법을 1 책 12 법이라고도 한다. 남의 가축을 죽인 자는 노비로 만들고 빚을 갚지 못한 자는 그 자식을 노비로 만들어 변상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러한 법으로 인해 사회의 질서가 유지되고 감옥이 없었던 것이다. 사회 계급은 귀족, 중간층 계급, 노비로 구성되어 있었다. 귀족들은 그 지위를 세습하면서 국정 운영에 참여하였다. 또한 넓은 토지를 소유하여 관리하며 거느리고 있었다. 신분 계급에 따라 집과 의관에 차이가 있었다. 영역 내 모든 토지는 왕의 땅이라는 의미에서 관련된 정책을 통해 토지는 분배되었다. 왕실의 직접적인 지휘였을 뿐만 아니라 전시에 뛰어난 공훈을 세운 임금이 포상의 형태였다. 왕이 부여한 위신과 식수당도 귀족들의 넓은 토지를 소유하는 원천이 되었다. 산업은 농업을 위조로 했으며 국가에서는 농업을 장려하였다. 그러나 피지배계급인 일반 민이 농사를 담당하였다. 세금제도는 세와 조가 있었는데 인두세에 해당하는 세로 무명 5 필에 곡식 5 섬을 받았다. 조는 상호가 1섬·중호가 7말·하호는 5말로 3등급으로 나누어서 내었다. 꽤 빠른 시기부터 한자를 사용하였다. 불교를 수용한 이후 한문을 보급하는데 촉진하였으며, 지방제도의 확충에 따라 한자를 사용하는데 필수적이었다. 고분은 크게 축조하였는데 이는 사후 세계에서도 많은 복락을 누리기 다양한 물자를 넣고 잘 보관하기 위해서였다. 또한 벽면에 그림을 그리는 것이 유행하였는데 생활 풍속이나 인물도, 사냥하는 모습 등 다양한 그림이 후기에도 역동성과 생동감이 생생하였다. 음악과 춤 등에 관한 그림도 있어 관련된 놀이 문화도 있었음을 알 수 있으며, 이는 고려시대 문화의 결정체로 볼 수 있다. 최고로 노력을 기울인 것은 성곽이었으며, 대부분 산의 능선을 따라 성벽을 쌓았다. 국제성과 독자성이 풍부한 문화를 건설하였다.
군사 및 멸망
군제는 왕을 최고사령관으로 하고 군 조직을 한 곳에 조직하는 등 귀족 군제와 유사하다. 국내성·평양성·한성의 3 경과 각성에 상비군을 두고 변방에 순라군을 두었다. 주요 발사 무기로는 각궁과 국궁을 사용하며 석궁을 사용하기도 하였으며, 성을 방어할 때는 돌을 던지는 투석병이 있었다. 도끼창(마늘창)을 병이 했으며 보병은 창과 칼 두 가지 무기를 사용하였다. 첫 번째는 짧게 두 개의 날이 있는 창으로 주로 던지는 데 사용하였다. 다른 하나는 한나라의 영향을 받은 칼자루가 달린 양날의 칼이었다. 투구는 날개 달린 가죽 및 말꼬리 장식과 유사했으며, 갑옷은 마늘갑옷이라 군인이 유연하게 움직일 수 있었다. 오랫동안 당과의 전쟁으로 인하여 크게 피폐해졌다. 북쪽의 국가들과 동맹을 맺어 나라의 안정을 유지하려 했지만 성과는 크지가 않았다. 최고 권력층 내부에서도 분열이 생기고 귀족들의 사치는 심각해져 갔으며, 세습으로 여러 곳에서 불만과 배신이 잦았다. 이러한 혼돈 상태로 어떠한 경제활동과 정치도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였다. 이어 대규모의 군사를 이끌고 당이 쳐들어왔다. 저항 끝에 항복하여 함락이 되었고 요동성을 거쳐 북부여성 일대가 공략되었다. 그에 따라 영역 내에는 당의 점령지가 마련되었다. 왕국의 수도이자 무덤은 오늘날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중국은 국책사업을 추진하면서 고구려 등의 역사를 중국 역사의 일부로 포함시키려는 편향된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이에 따라 고구려사 계승을 한국의 역사로 증명하는 연구에 힘써야 하는 과제를 남기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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