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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역사(한국사)

현종 이연 생애와 즉위, 제도 정비, 재위 후반

by 한국 역사(한국사) 2024. 4. 23.

현종 이연 생애와 즉위, 제도 정비, 재위 후반

현종 이연은 북쪽 지역을 정복하려는 정당한 운동을 중단하였지만 군대를 강화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였다. 재정구조의 재건을 위해 가계의 증대, 농업의 발전, 세금 징수 체계의 확립 등 노력을 기울였다.

생애와 즉위

효종과 어머니인 인선왕후의 아들이며, 그의 아버지인 효종이 당시 청나라에 인질로 살고 있을 때에 태어났기 때문에 조선의 역대 임금들 중에서 유일하게 중국 청나라에서 태어나게 되었다. 조선 왕실 역사상 즉위 과정이 정상적으로 이어졌던 극소수의 사례 중 하나이다. 아버가 사망한 후 즉위하여 그는 왕비 이외에 후궁이 없는 유일한 군주이다. 태어날 때부터 독특한 기질과 웅장한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여자 형제들이 사이에서 자랐기 때문인지 성격이 온화하였다고 한다. 인조의 장남이었던 소현세자가 죽자 모후는 3년 동안 상복을 입었으므로 서인의 1년 동안 상복을 입어야 한다는 주장이 채택되었다. 또한 부인 인선왕후가 죽자 며느리의 상중에 자의왕후가 언제까지 상복을 입어야 하는지를 두고 다시 논쟁이 벌어졌다. 서인은 연복을 정한 뒤 대관복으로 수정하였지만 남인은 대관복의 부당성을 지적하며 연복을 주장하였다. 이때 서인의 주장을 거부하고 남인의 연복을 채택하여 서인 정부가 붕괴되고 남인이 실권을 장악하였다. 이후 이와 관련된 논란이 다시 불거지면 좌시하지 않겠다고 경고를 하였다. 자신의 중립성을 지키면서 왕권과 신권의 충돌에서도 강경한 입장을 취하며 뛰어난 정치력을 통해 자신의 뜻을 잘 전달하는 현명한 임금이었다. 쿠데타 후 약화된 권력을 늘리기 위해 지방 세력을 규제하고 권한을 강화하여 중앙집권화를 이끌었다.

제도 정비

이를 이어받아 여영 군사 제도 아래에 훈련 부대를 설립하였다. 먼저 가계의 증대를 위해 서민들의 삭발과 사찰 출입을 금지하였다. 이듬해에는 수도 내에 있는 자수와 인수의 두 사찰을 폐지하고 젊은 승려들의 출가를 허용하였다. 산간 지역의 피난민들을 단속하여 호적에 포함시켰다. 국가 경계 지역에 불법으로 드나드는 사람들을 처벌하는 법을 제정하기도 하며, 여러 조정의 분파를 힘을 합치기 위한 법도 제정하였다. 한 일화로 병자호란 때 어린 나이에 몽골군에게 붙잡혀 청나라로 끌려가 노예로 살았던 안주원은 주인이 죽은 후 조선을 그리워하여 도망쳐 돌아왔다. 당시 법으로 제정할 만큼 국경을 넘는 사람들을 엄벌하였지만 예외로 고향으로 돌아가 살도록 하였다. 이미 부모와 형제가 죽고 자신이 갈 길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자 다시 청나라로 돌아갔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청나라는 보고를 하지 않은 것과 유황을 소지하고 있었던 사실에 대해 우려를 제기하여 왕실 사신을 파견하여 진상을 조사하였다. 이때 모든 것이 본인의 책임이고 그 죄는 자신의 것이라며 대신들에게 이야기하여 결국 이 일화는 청나라에 벌금을 내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난파선의 난파를 막기 위해 충청도 안흥 지역에 남창과 북창을 설치하고 이 구간들을 육로로 운송하였다. 재정의 부족함을 채우기 위하여 영직첩과 공명첩을 대량으로 발행하였다. 이것은 후에 정부의 재정적 보완책으로 널리 퍼지게 되었고 이는 신분제 제도의 해체에 크게 기여를 하였다. 또한 강화도 정족산성에 새로운 역사 건물을 세워 역대 왕들의 기록들을 보관하게 하였으며 교서관에 활자가 주조되었고 큰 글자와 작은 글자의 주조가 완료되었다. 백성들의 역사상 최악의 순간이 있었는데 전 세계적인 이상저온 현상으로 곡물 생산량이 급감하면서 기근과 각종 전염병이 잇따라 퍼졌다. 그래도 생활 안정을 위해 최선을 다하였고 대동법이 호남지방까지 확대하여 시행하였는데 호남지방이 곡창지대임을 감안한다면 민생고를 해소하는 데 어느 정도 효과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재위 후반

평생 허약한 몸에 시달렸다. 특히 기록에 따르면 종기를 달고 살았는데 종기에서 고름이 십여 개나 나온 적이 있다고 한다. 두 번의 논란과 심각한 자연재해 속에서도 군주로서의 힘을 보여주었다. 거란의 침입으로 두 번이나 도피해야 했고 비극적인 초기에도 불구하고 전쟁 중에 침착하게 대응하였고 거란의 침입을 막았다. 전쟁 후에 고려의 국가 체계를 개편하고 재능 있는 사람들을 적극적으로 영입하였다. 그러나 그 때문인지 잦은 스트레스로 인해 잔병에 시달렸다. 온천의 다니면서 큰 효험을 봤다는 선왕들의 사례를 참고하여 통치 기간 내내 온천을 자주 이용하였고 말기에는 고열로 무척 괴로워하다가 증세가 약화되어 결국 오래 살지 못하고 짧은 수명을 다하였다. 그의 어머니가 사망한 지 겨우 반년 만에 승하하였다. 능은 경기도 구리시에 위치하고 있으며 그의 아내와 함께 묻혔다. 한가지 다른 점과 독특한 점은 정자가 팔각형 지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 무덤은 비공개로 나라에서 관리를 하고 있는데 남쪽에 연못이 있고 그곳에 사는 희귀한 새들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뚜렷한 존재감과 개성으로 완전한 임금에 대한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는 평가도 있지만 논란을 통해 서인을 중심으로 한 정국의 균형을 어느 정도 잡으려 했고 이에만 집중하지 않고 병자호란 이후 혼란에 빠진 나라를 재건하고 돌보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더구나 세간의 의견과 달리 아버지 효종의 장남으로서의 지위를 확인하고자 적극적으로 나섰다. 동일한 묘호를 사용한 이전 군주가 고려 시대에도 인물이 한 명 있었다. 뛰어난 군주로서 여전히 한국 역사상 가장 유명한 임금 중에 한 명임을 감안하면 당시 그는 높은 평가를 받았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