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숙종 이순은 당시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장남의 수난과 불행을 깬 유일한 사람이다. 정치적 문제에 대한 해결책으로 아내들을 적극적으로 이용하였던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왕권 강화
그의 할아버지와 아버지에 이어 왕이 되었다. 이것만으로는 정당하다고 보기에 부족하였지만 외척과 관련된 문제가 없었던 덕분에 부계와 외척 모두에서 완벽한 정당성을 가지고 태어난 임금이었다. 왕후나 왕세자의 장남 또는 장손으로 태어난 그는 원자(원손)-세자-왕세자-왕의 순서로 직무를 수행하였다. 무엇보다도 당시 기준으로 보았을 때 장수한 군주였다. 결단력이 강하였고 성격이 급하고 다혈질에 냉혹하였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수단과 방법도 가리지 않았다. 자신의 임무만큼은 잊지 않았고 본인과 무관한 사람은 해치지 않았다. 어린 시절 허약한 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성격은 매우 악랄하였다. 아버지 현종이 온화한 성격을 지니고 있었던 반면 정반대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악랄한 성격은 아들 경종과 영조에게 이어졌다. 그는 궁녀들이 그의 머리를 빗겨주고 궁중행사에 입히려고 하면 몸서리를 칠 정도로 역겨워하였다. 결국 궁녀들이 당황하여 이 일을 꺼려하였기 때문에 머리를 빗어주는 일을 담당한 사람은 명성왕후였다. 그래도 칭얼거리며 싫어하였고 그 성격을 견디지 못하여 명성왕후는 그의 머리를 빗으로 내리치며 빗어준 일화가 있다고 한다. 조선에서 가장 자학적인 명성왕후라 할지라도 그녀의 악랄한 성격마저 아들을 이기지 못해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 할 정도였다. 경제적으로 민생안정을 도모하기 위해 대동법을 시행하였고 동전을 본격적으로 생산하기 시작하였다. 주된 목적은 재정의 확충이었으며 이 의도는 옳았고 화폐 생산을 통한 수익으로 국가 재정을 조달한다는 개념이 조선 말기까지 뿌리내렸다. 대외적으로는 일본과의 무역이 크게 번성하였고 더욱 경제는 점차 나아졌다.
권력과 환난
즉위 전 각 계파 간의 견제와 균형으로 이루어졌다면 그의 재위 기간 때부터는 한 계파에 의해 모든 권력이 독차지하였다. 여기서 왕족이 서인 세력에 의해 탄핵됨으로써 외척인 서인 김씨 가문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서인 집안은 주로 외척과 관련이 있었다. 어머니인 김씨의 아버지와 외할아버지 또한 서인 사람들이었다. 남인과 서인의 싸움은 친척과 외척의 싸움과 다름이 없었다. 이는 선조 때 정철과 기축옥사로 대표되는 파벌 간의 유혈 권력 다툼과 유사했는데 이때 처음 파벌이 발생하였다. 이에 따라 집권당이 바뀔 때마다 그의 복수로 폭풍이 몰아쳤다. 이러한 정치는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조치였고 임금의 자리에 있는 동안에는 큰 문제가 없었다는 것이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는 견해이다. 살아있는 동안 그는 신하들에게 더욱 존경을 받았고 왕에 충성하도록 맹목적으로 강요하였다. 자신이 죽인 장희빈의 아들 경종이 나중에 연산군과 같은 유혈사태를 일으킬까 두려워 노론과 결탁하여 경종을 폐위시키려고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이러한 임금으로서의 경험 때문에 노론은 경종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고 소론은 이를 이용하여 유혈사태를 일으켰다. 잦은 귀향과 사제 탄압 정치, 즉위, 정국은 혈투가 되었고 독살설과 역모설이 무성하였다. 영조 즉위 이후 점차 소수 정파의 일당독재로 발전하였다. 결국 영조와 정조 때 탕평책은 겨우 추진될 수밖에 없었다. 탕평책은 숙종이 균역법이라는 이름으로 처음 만든 것이다. 근본적으로 신하들을 동등한 존재로 보지는 않았다. 건강이 악화되고 있을 때에도 세자를 영조로 바꾸려는 노론파와 경종을 지키려는 소론파는 끊임없이 싸웠다. 노론파의 공격에도 불구하고 사망할 때까지 세자의 지위는 그대로 유지되었다.
즉위 후반
조선의 모든 임금들 중에서 사망 당시의 모습이 상세히 기록된 왕이었다. 그가 사망할 무렵 그는 왼쪽 눈의 시력을 잃었고 오른쪽 눈도 잘 보이지 않았으며 복수로 고통을 겪었다. 그의 배는 가스로 가득 차서 불룩하였고 가족들과 신하들이 찾아와 말을 걸었지만 말 뜻을 이해하지 못하였다. 가래 끓는 소리를 많이 내다 결국 승하하였다. 평생을 호소한 병은 산증으로 하복부가 아프고 대변과 소변이 잘 나오지 않는 증상이었다. 현대 의학에서는 방광근육 내부에 궤양과 섬유화가 생겨 방광의 기능 저하와 하복부의 지속적인 통증, 혈뇨 등이 나타나는 간질성 방광염으로 간주되었다. 시절 최대의 권력을 누린것에는 산증으로 고생한 것이 그의 악랄한 성격을 더욱 부채질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당시에는 감정적이었던 성격으로 자연스럽게 화병에 걸리고 화병의 영향으로 산증까지 앓았을 것으로 추정되는 것으로 보인다. 현대적으로 보면 신경증적인 사람이 과도한 스트레스에 시달리며 스트레스 장애가 생기는 상황과 비슷하다. 무덤과 관련된 기록이 있는데 밀행을 떠났을 때 한 청년이 언뜻 보기에 좋지 않아 보이는 수변에 부모님의 묘를 짓는 것을 보고 물었다. 답하기를 풍수지리상이 그렇게 하라고 했다고 한다. 이에 풍수지리상이 돌팔이라서 그랬을 것이라 생각하고 그 청년에게 큰돈을 주고 관리에게 좋은 곳으로 옮기라고 말하였다. 그리고는 풍수지리상에게 화를 내기 위해 집으로 찾아갔다. 생각보다 검소하게 살고 있는 모습을 보고 감명을 받아 큰돈을 주겠다며 자신의 무덤을 봐달라고 부탁하였다. 풍수지리상은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곳의 위치를 알려주었으나 끝까지 상을 받지 않았고 그의 무덤은 이 풍수지리상이 알려준 곳으로 경기도 고양시에 위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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