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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역사(한국사)

인조 이종 초기와 출생, 두 번의 호란, 재위 말년

by 한국 역사(한국사) 2024. 4. 21.

인조 이종 초기와 출생, 두 번의 호란, 재위 말년

인조 이종은 황해도에서 선조의 첫 손자로 태어났으며, 임진왜란으로 피신해 있을 때 구씨 부인이 그곳에서 그를 낳았다. 시대적 상황을 보았을 때 나라는 지속적인 위기와 어려움에 놓여져 있었다.

초기와 출생

실록에 나오는 기록을 보면 허벅지에 수없이 많은 사마귀가 있었다고 하는데 이를 본 선조가 고조부와 같은 상이니 드러내면 안 된다고 부탁하였다. 출처가 확실한 만큼 왕으로 부각하기 위하여 추가된 기록으로 선조가 직접 이름을 지어 주어 총애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를 본 광해군이 크게 불만을 품고 있었다는 기록도 있지만 왕실 장례의 전형적인 과장으로 보이기도 한다. 10살이 되었을 때 문안 인사를 드릴 때마다 재롱을 부렸고 그림을 그려 주면서 모두를 기쁘게 하였다. 총애를 받던 인조는 능양대군으로 추존되었으며 형이자 유력한 세자 후보였던 신성군이 어린 나이에 죽고 광해군이 세자로 책봉되었다. 정치에 일가견이 있었던 할머니 인빈 김씨는 조카딸을 후궁으로 불러들였다. 여러 방면에서 도움을 주었기 때문에 초기까지 좋은 대우를 받았다. 하지만 집권 중반으로 갈수록 의혹이 심각해지면서 역모 혐의가 제기되면 사실 여부의 확인을 떠나 옥고를 치르게 되었는 그의 혈족도 예외가 아니었다. 영창대군을 죽이고 인목왕후를 폐위시킨 부도덕한 행위는 좋은 명분으로 작용하였다. 서인들은 모반을 모의하기 시작했고 이는 더욱 가세하였다. 능양군을 중심으로 한 서인 세력이 반란을 일으켰고 이 반란은 계획대로 진행되었다. 도망가서 이미 잠적한 후에 군사들이 궁궐 안으로 들어갔으나 궁궐은 텅 비어 있었고 찾지 못하였다. 이때 횃불이 잘못 더져지고 궁궐은 차례로 불에 탔다. 폐위된 광해군은 곧 체포되어 옥에 가두었고 광해군 정권 때의 실권자였던 신하들을 모두 참수하고 유배지로 보내었다. 원수로 여겼던 인목왕후는 즉각적인 복수를 주장하며 자신의 권한을 최대한 주장하여 인조를 다음 왕으로 올리는 것에 대해서는 미루었다. 그러면서 임금의 인감을 자신에게 넘기라고 하여 실권을 쥐려고 하였다. 신하들과 인조의 끈질긴 설득과 압박으로 왕의 인감과 즉위 명령을 받고 드디어 조선 16대 왕이 되었다.

두 번의 호란

왕위에 올랐을때 서인 정권은 공통적으로 친명 정책을 고수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대부분은 주화론자였다. 병자호란 직전까지 정권은 적극적인 반청 정책을 펼친 적이 없었다. 오히려 선대 왕의 외교적 성과를 인정하고 이를 적극적으로 계승하였다는 연구도 있다. 그 근거는 내부적으로 광해군 때 외교를 담당하는 대신들을 유임시키고 후대를 자극하지 말자는 논의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반 대중에게 친청정책을 내세우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문제였다. 당시에는 근본주의적인 성리학이 강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결론은 이러한 친명 정책에 힘입어 인조의 제위 기간에 다시 침입했다는 것이다. 처음부터 반정부 세력의 주요 인물들은 주화론파의 일원들이었다. 전쟁의 원인은 천명 누르하치 황제와 홍타이지 황제 때의 정치적 이유와 대북 정책에 대한 견해차가 컸다. 누르하치가 조공무역을 독점하며 쌓아온 경제력은 홍타이지 무렵 고갈되고 있었다. 또한 내몽골을 정복한 후 연속으로 만주에 대기근이 발생하여 청나라는 심각한 경제 위기에 빠졌다. 이 시점에서 청나라는 국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조선과 명나라에 대해 계속해서 공격적인 요구를 했지만 상황은 점점 수복으로 치닫고 있었다. 식량 가격이 8배나 올라 군대를 유지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고 절박한 상황에 처했다. 이미 후금에 대한 정보를 캐내는 등 철통 방어를 하고 있었다. 홍타이지가 후계자가 되기 전부터 계속 주시하고 있었기 때문에 조선을 공격할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다. 그러나 폐위를 핑계로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두 차례 겪게 되었다. 의병의 구제를 바라며 남한산성에서 농성을 벌였지만 근왕의 군대마저 청군에 의해 흩어지게 되었고 더 이상 희망이 없었다.

재위 말년

공양을 아끼지 않았고 성을 나가자고 했으며 소현세자도 스스로 가서 인질로 청나라에 직접 가겠다고 하였다. 결국 주권을 지키는 조건으로 항복하였고 청 태종 앞으로 끌려가 머리를 바닥에 피가 나도록 찧으며 최대의 굴욕을 당하였다. 남한산성에서 굴욕을 겪은 이후 왕권이 땅으로 떨어졌고 신하들을 처벌할 수도 없었다. 당시 비석이 만들어졌는데 근대에도 남아 있는 이 비석은 당시 유교국가이자 명나라에 대한 철저한 복종을 유지하고 있던 조선에 참으로 큰 수치였다. 조선 후기 내내 수치심을 상징하는 것으로 남아 있었고 고난을 겪으며 역사상 최대의 어두운 부분으로 여겨졌다. 황폐화된 나라를 회복하기 위해 농경지를 복구하는 등 경제적으로 안정을 위한 정책을 시행하려고 노력하였다. 또한 학문과 문화의 발전에도 많은 관심을 가졌다. 재위 기간 동안에 여러 학자들과 문인들이 활동을 하였으며 특히 서양 학문에도 관심이 높았다. 병자호란 이후 혼란스러운 상황 중에 소현세자가 청나라의 인질로 잡혀가자 정부에 남아있던 신하들은 후계자로 봉림대군으로 추천하였다. 청나라에서 인질 생활을 끝낸 아들이 돌아왔을 때 냉담하게 대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들이 의문을 남기고 갑자기 죽었을 때에도 이를 조사를 한다거나 어떠한 조치를 하지 않았다. 이 모습을 보았을 때 신하들의 이간질과 청나라에서 소현세자를 긍정적으로 보았던 점들을 생각해 볼 때 왕위의 위협을 느꼈을 것이다. 본인조차 반정을 통하여 왕이 된 것에 대해 늘 불안을 느꼈던 그는 차남이었던 봉림대군을 세자로 책봉하였다. 또 한 번 왕권의 정통성이 약해지게 되었고 이후로도 왕권을 회복하지 못한 채 병으로 사망하게 되었다. 능은 경기도 파주시에 위치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