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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역사(한국사)

광해군 이혼 시대적 상황, 왕위 갈등, 죽음과 인물 평가

by 한국 역사(한국사) 2024. 4. 20.

한국 역사(한국사)의 조선 왕 계보(광해군 이혼)

광해군 이혼은 선왕 때 임진왜란으로  7년 동안의 전쟁으로 초기에 한성이 함락되고 의주로 도망가는 등 패색이 짙었다. 그는 조선 최초의 서자 출신이며, 기록을 통해 나름대로의 강력했던 권력을 가졌을 것으로 보인다.

시대적 상황

아버지인 선조가 왕위에 있던 시절 부산포 앞바다에 20만 명의 왜군이 밀려들어왔다. 그러나 이순신의 해전 승리 소식이 계속되고 여러 지역의 의용군 활동과 명나라 군대의 참전으로 전쟁은 유리하게 전개되었다. 결국 조선에서 왜군을 몰아내었다. 임진왜란을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된 요인으로 열거된 여러 가지 요인들이 있는데 여기에 포함되어야 할 것이 사단 활동이다. 분조는 말 그대로 조정을 나눈다는 뜻이라 할 수 있다. 임진왜란 당시 의주와 평양에 거주했던 원래의 정부와 이와는 정반대로 다르게 전쟁을 극복하기 위해 이끄는 정부를 말한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에 선조는 정실부인에게서 자식을 낳지 못하여 정당한 자녀가 없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후궁의 소생 중에서 선택을 해야 했다. 후궁들에게서는 장성한 여러 자녀가 있었으나 왕위를 이어받을 만한 인물이 없었고 그나마 어렸을 때 두각을 보였던 인물을 세자로 책봉하려 하였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적장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정치적 혼란이 있었고 신하들의 뜻에 따라 세자 책봉 없이 임진왜란을 맞이하게 되면서 긴박감에 휩싸였다. 결국 선조의 나이와 당시 나라의 상황을 판단하여 후계 문제를 더 이상 미룰 수 없다고 의견을 모아 마지못해 세자로 책봉하고 책임을 맡겼다. 전쟁 중 평안도와 강원도를 돌며 민심을 수습하고 경상도와 전라도로 가서 군수품을 수집하고 군수 장비를 조달하는 등 큰 공을 세웠다. 이러한 활동으로 임진왜란을 극복하는 데 큰 요인이 되었다. 이로 인하여 세자로서의 입지가 강화되었다고 생각하였지만 영창대군이 태어나면서 상황은 그렇지 않았다. 선조는 영창대군이 그다음 자리를 이어받았으면 하는 속마음을 신하들에게 내비쳤지만 행운의 여신은 그의 손을 들어주었다. 

왕위 갈등

왕위에 올랐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문제가 완전히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임금의 자리에 오른 직후 자신에 반대하는 세력의 핵심인물과 그의 측근들을 제거하였다. 중국에 사절단을 파견하여 선조의 승하와 자신의 왕위 계승을 알렸다. 조선은 건국 이후 중국과 사대 질서에 편입되어 있던 상태였다. 그래서 왕이나 왕비의 즉위나 승하 소식이 있을 경우 중국에 사절단을 보내어 이를 알리고 적절한 칙령을 받아 정통성을 확인하였다. 알리기를 장남이었던 임해군이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차남이었던 광해군이 왕위 계승을 이어받았다고 하였다. 그러자 이의를 제기하였다는 뜻밖의 소식을 전달받아 듣게 되었다. 파견되었던 신하가 여러 가지 이유를 제기하였지만 통하지 않았다. 마침내 이를 확인하기 위해 명나라의 사절단을 조선에 파견하였다. 드디어 인정을 받고 위기를 묘면하였지만 쉽지 않은 재위였다. 임해군 문제가 해결되었음에도 왕위는 바로 안정되지 않았다. 그에게는 이복동생인 영창대군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형제들의 존재만으로도 언제나 항상 왕권에 부담을 가졌다. 영창대군을 왕위에 올리기 위해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영창대군과 그 무리들을 유배 보내고 처형을 하였다. 이에 영창대군은 유배지에서 어린 나이에 생을 마감하였다. 이 사건을 시작으로 자신의 왕권의 걸림돌이 되는 요소들을 하나하나 제거해 나가며 왕권을 강화하였다. 또한 허준이 동의보감 편찬을 완성하는 데도 힘을 보태었다. 더불어 당시 조선을 둘러싼 대외관계에서 실용외교예 전향적인 태도를 보였다. 대동법을 시행하여 민생과 재정이 안정되도록 하는 등 전쟁으로 황폐해진 나라를 재건하는 데 주력을 다하였다. 하지만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진 궁궐을 수리하여 복원을 하였는데 그러면서 경제가 파탄나기 시작하였다. 

죽음과 인물 평가

본인의 뜻과 반대로 백성들의 민심은 불만으로 극에 달하였다. 측근들은 막강한 권력을 이용하여 부정부패로 나라의 형세는 나아지지 않았고 점점 더 황폐해져 갔다. 서인이 주도하여 일으킨 인조반정으로 인해 왕위에서 폐위되어 충청도에서 강화도로 옮겨져 유배되었으며 다시 제주도로 유배되었다. 가족들 모두 강화도 유배지에서 죽었으며 그 또한 제주도에서 외부와 출입이 차단되었고 엄격한 통제된 생활 속에서 사망하였다. 독살로 사망하였다는 주장과 화병으로 건강상 사망하였다는 주장도 있지만 이는 정확히 사인을 알 수 없다. 무덤은 경기도 남양주에 위치하고 있다. 과거 왕들의 행동에 비하면 폭군이라는 이미지로 당시 혼란한 사회적인 배경 속에 신하들 간의 정치적인 이념의 갈등으로 희생되었다. 인조반정 때 축출되면서 다른 왕들이 평소 가지고 있던 묘호는 더 이상 가지지 않게 되었다. 또한 15년 동안 왕위를 지켰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오늘날에도 정당한 장남보다는 후궁에게 태어난 왕자의 이름으로 여전히 불리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그가 후궁의 아들이기 때문에 당연하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어느 때에도 그의 묘명에 대해 논의하지 않았다. 내란으로 축출된 이유는 그의 잘못된 처신과 대외 정책 때문이었다. 당시 지배층인 사람은 명분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성을 중시했을 뿐만 아니라 임진왜란 때 중국과의 관계에서 조선을 도와준 명나라에 대한 고마움도 있었다. 그러나 본인이 행한 모습은 이와는 완전히 사뭇 달랐다. 그래서 묘호를 받지 못한 것과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은 당시 시대적인 이상과는 전혀 다른 왜곡된 방향을 추구했던 결과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