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효종 이호는 조선의 17대 왕으로 그가 남긴 정책으로 잘 알려진 임금이었다. 10년간 재위 기간 동안 조선 부흥의 기틀을 마련한 군주이기도 하다.
즉위 과정
광해군 때 능양군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친모는 한씨 인열왕후이며 계모는 조씨 장렬왕후이다. 인조 때 8세의 나이로 봉림대군으로 임명이 되었다. 그는 병자호란 때 형과 함께 청나라에 인질로 잡혀갔다. 형이 궂은일을 해야 할 때나 곤란한 일을 해야 할 때마다 본인이 대신하겠다고 제안할 정도로 진심으로 형을 보호하려고 하였다. 조선으로 돌아와 한 달 후 소현세자가 사망하였고 형을 대신하여 세자로 임명되었다. 그의 아버지 인조마저 세상을 떠나자 창덕궁에서 즉위하였다. 임금으로 즉위하자 친청파였던 전의 세력들은 맹렬하게 탄핵하였다. 평소 행실이 단정하고 모범적이었기에 개인적인 모습은 제사장과 비슷하면서도 군세를 확장하고 새로운 대신을 임명하여 타락한 왕권을 강화하는 역할을 하였다. 또한 당시 외모가 출중하였고 힘이 세서 무거운 무기도 잘 다뤘고 업무가 끝나면 말을 타고 무예를 잘하기도 했다고 한다. 형수였던 강빈과 그의 조카들을 숭배하고자 하는 신하들에게 지나치게 단호한 태도를 보인 것은 그만큼 그의 정통성이 약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강빈은 역적 취급을 받는 수모를 겪었다. 세자로 있었던 시절에는 사이가 전혀 나쁘지 않았고 즉위하였을 때에도 조카들은 보호하면서 강빈은 역적으로 몰아가는 이중성을 보였다. 조카 중 한 명이 청나라에 강제로 시집을 가게 되자 즉시 제지하기도 하였고 경안군을 유배에서 벗어나게 해 주고 궁으로 돌아오는 것을 도왔다. 당시 천하에 강국이었던 청나라에 거슬리는 행동은 조심스럽게 하였고 조금씩 경제 질서를 확립하기 위해 다양한 정치를 시도하였다.
북벌 준비와 군비 확장
북벌을 수행하기 위해 이끄는 산당과 손잡고 북벌을 추진했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알려진 이야기이다. 하지만 실제로 북벌에 극히 소극적이었고 북벌의 정당성을 설명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신하들은 북벌을 이용하여 정치적 연합을 통해 사림파의 반발을 제압하고 이들 파벌을 포섭하여 왕권을 강화하려 한 것으로 보고 있었다. 한편 북벌의 의도는 없었으나 적극적인 지원을 받아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공고히 하는데 최선을 다하였다. 서인파의 당주 송시열을 전면에 내세워 불안정한 정국과 민심을 진정시키려 했다. 여당의 당주는 자신의 근거지가 된 사당을 추대하는 데 앞장섰다. 산당을 중심으로 한 서인파를 아우르며 왕권 강화를 시도한 것으로 종종 볼 수 있다. 그러나 걸림돌이 되는 산신궁들을 장악하면 그를 인정하고 정통성을 보장해 줄 반대 세력들이 등을 돌릴 것이 뻔하였다. 정부에서 일하는 세력과 사대부들의 사이의 권력 격차는 박대하다. 세력 일부와 정부 내 친청파의 지지 수준으로는 정통성 확보는 물론 국정 운영도 거의 불가능하였다. 북벌론으로 군사를 양성하고 소총과 대포 개량 등 국방 측면에서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여러 가지 각종 개혁입법과 시정헌권 등 새로운 국제 기준의 도입 등으로 전후 민생의 고충을 수습하려고 노력을 기울였다. 특히 오늘날 충청도 및 전라도 지역에 대동법을 실시하였고 상평통보를 화폐로 유통시키는 등 다방면에서 의욕이 강했다. 군사력을 회복시키고 북벌을 주장하였지만 청나라를 먼저 공격한다던가 불쾌한 서신을 보내지 않는 등 협조적인 모습을 보였다. 이렇듯 명분만을 앞세우고 실질적으로는 정책에는 추진하지 않았으며 갑자기 사망하자 북벌론은 폐지되었다.
죽음과 장례
기록에 따르면 좋지 않은 징조가 유난히 많이 남아 있는 것이다. 이상하게도 의료사고로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당시 얼굴에 난 종기를 치료하던 중 바늘을 이용하여 피를 뽑고 독을 제거하자고 하였다. 침 구멍에서 고름이 나온 후 검붉은 피가 나왔고 멈추지 않았다. 계속 지혈을 하였지만 바늘이 동맥을 손상시켜 잘 되지 않았고 결국 과다 출혈로 허망하게 사망한 것이다. 사망한 후 장례 절차에 문제가 생겼다. 시신을 넣기 위해 관을 마련하였는데, 어깨가 부분에서 관이 맞지 않았다. 조선시대에는 왕의 관을 미리 만들어 놓았는데 장례 절차는 즉위하자마자 관을 만들었다. 세상을 떠날 때까지 매년 옻칠을 하여 보관하는 절차를 따랐기 때문이다. 체구가 커서 보통 사람들보다 체중도 많이 나갔고 재위 기간 동안 어깨도 점점 두꺼워지고 넓어져서 미리 제작했던 관의 크기가 맞지 않아 관을 다시 만들었을 정도였다고 한다. 실록에 따르면 예부터 염을 단단히 묶지 않으면 부모가 다시 살아날 수도 있다는 믿음과 실제로 부모가 다시 살아나기를 바라는 효심으로 보여주었다고 한다. 기록에 따라 당시 염을 단단히 묶지 않아 시신이 부패하고 부풀어 올라 관이 맞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어쨌든 이 때문에 널빤지를 연결하여 관을 연장해야 하는 초유의 일이 발생하였고 널빤지를 연결한 흔적을 감추기 위해 옻칠을 더하였다. 즉위하자마자 미리 관을 만들어야 하는 당시의 절차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가 죽은 후 조선 역사상 가장 각렬한 사상 논쟁이 벌어졌다. 무덤은 경기도 여주시에 있으며 세종의 무덤과 가까운 위치에 있다. 처음에는 수원으로 예정하였지만 노동력과 비용이 많이 든다는 이유로 경기도 구리시에 묻혔다. 그러나 왕릉의 비석들에 균열과 손상이 계속 발생하자 현종 때에 지금의 위치로 옮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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