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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역사(한국사)

경종 이윤 당시 사회 배경, 즉위와 대리청정, 업적과 승하

by 한국 역사(한국사) 2024. 4. 25.

경종 이윤 당시 사회 배경, 즉위와 대리청정, 업적과 승하

경종 이윤은 통치 기간이 짧았기 때문에 어떠한 중요한 업적도 남기지 않았고 당연히 역사에서 중요성은 미미하였다. 그러나 통치 기간을 설명하기 위해 역사의 필수불가결한 한 페이지로 여겨진다.

당시 사회 배경

숙종과 희빈 장씨의 장남으로 태어나 가장 총애했던 여인 희빈 장씨에게서 아들을 얻었을 때 매우 기뻐하였다. 태어난 지 100일도 안 된 경종을 원자로 임명하여 이름을 지어주었으며, 후궁이었던 희빈 장씨의 신분을 올려주었다. 3살이 되던 해에 세자로 책봉되었다. 4살이 되었을 때 직접 천자문에 서문을 써서 세자 강원에게 주었다. 6살부터 서연을 공부하기 시작하였고 8살에 입학식을 거행하였으며 같은 해 세자 의식을 열었다. 9세에 유학자 심호의 딸을 세자빈으로 맞이하였다. 장희빈이 노론파의 지배를 받자 정치적인 노론의 압력으로 세자로서 불안정한 지위를 유지하였다. 또한 후계자를 둘 수 없었기 때문에 말년에 노론의 좌의정이자 이이명과 독대하였다. 그리고 후계자 가능성을 언급하였지만 관리는 그에게 입학시험을 허락하지 않았다. 숙종의 중궁이 태자를 배출할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에 칭호가 결정된 이후로 조정에서 논란이 있었다. 반대 의견을 무시하고 장희빈을 소의에서 빈으로 승진시켰다. 그 후 중궁을 폐지하고 장희빈을 왕비로 책봉하였다. 원자로 있을 때도 그는 당쟁에 휘말렸다. 숙빈 최씨가 숙종의 환심을 얻으면서 이복형제인 영조가 태어나 관심 밖으로 멀어지기 시작하였다. 장희빈과 외삼촌에 대한 처벌 문제를 둘러싸고 동조적이었던 군론과 구론이 충돌하게 되었다. 이러한 정치적 충돌로 남인이 권력에서 떨어지고 서인은 노론과 소론으로 분열되면서 숙빈 최씨는 노론으로부터, 그는 소론으로부터 각 각 세력의 지지를 받았다. 후반에 이들 정파 간의 갈등이 커졌고 결국 노론이 정무에 앞장서게 되었다. 장희빈은 왕비에서 다시 빈으로 좌천되었고 숙종은 사당을 짓고 인현왕후를 저주한 죄로 자진 자수를 명하였다. 이 사건으로 점차 내성적인 성격으로 바뀌었다.

즉위와 대리청정

경종의 원자 시절 조정을 이끌던 노론파는 숙종에게 정당한 후계자가 없으니 영조를 지지하였지만 후궁인 장희빈의 소생 경종을 태자로 책봉하자고 하였다. 그리고 조정의 책임자 조성복은 막 왕위에 오른 숙종의 병환으로 그에게 조정에서 물러나 경종에게 대리인으로 세우라고 호소하며 압력을 가하였다. 그러한 분위기 속에서 원자였던 경종이 세자로 책봉되면서 대리청정을 시작하였다. 직무는 종묘와 산릉에서 제사를 지내고 5일마다 거행되는 빈청 첫날에 대신과 비변 대신을 세자의 거처인 시민회관에 입적시켰다. 인사, 형사 행정, 군권 등을 제외한 총무는 직접 정하되 결정하기 어려운 중요한 사항은 숙종에게 보고하도록 하였다. 그는 대리청정으로 있으면서 무리 없이 직무를 아주 잘 수행하였다. 경희궁에서 왕위에 올랐다. 숙종의 병적으로 사망 후 지지하였던 노론파가 정국을 완전히 장악하면서 그는 임금의 자리에 올랐고 왕권은 불안정하고 약했다. 노론 일당은 평소 말수가 적고 자신의 의견을 강하게 피력하지 못하는 왕에게 노골적인 불충을 보였다. 장희빈에 대한 추앙 문제, 세자 설치 문제, 부사 추정, 그의 처신 등이 대표적이었다. 즉위하였지만 조정을 이끌 수 있는 위치에 있지는 않았다. 소론의 김일경은 대리 정권을 일으킨 조성복을 비롯해 노론 대신들을 왕에 대한 불충을 고발하고 정계에서 추방하였다. 이듬해 노론파가 왕을 암살하려 했다는 고발로 그들은 사형, 유배형, 추방형을 받았다. 2년에 걸친 사건으로 소론파가 정권을 잡게 되었다. 세자로 있던 기간이 제일 길었다. 아버지와 이복 형제의 통치 기간에 비해 단지 4년 동안 지속되었다. 

업적과 승하

원자, 세자, 임금으로 있는 기간 동안 극심한 당쟁으로 비변사는 제 기능을 하지 못하여 중요한 사안을 결정하는 데 호란을 겪기도 하였다. 이러한 혼란스러운 정치 상황에서도 왕위를 계승할 수 있도록 노력하였다. 아버지의 뜻을 이어 사족에 대한 과도한 숭배를 주장하는 사람들을 유배 보냈고, 백성들의 생활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호서와 영남의 쌀을 기근에 시달리는 제주도에 옮기고 말의 공납을 중단시켰다. 양반집 딸은 궁녀로 뽑지 못하게 하였고 살아있는 동물의 공납은 죽은 동물로 대체하도록 하였다. 진하사가 청나라에서 받은 서양시계 문진종은 낮과 밤에 상관없이 시간과 날씨를 짐작할 수 있다고 하여 관상용으로 만들었다. 또한 관상감의 관리가 청나라에서 가져온 물총이라는 소화기를 만들어 화재에 대비하기도 하였다. 이렇듯 역사학자들은 훌륭한 군주의 자질을 갖췄다고 평가하였지만 좌우의 관리들은 그를 제대로 보좌하지 않았다고 한다. 즉위 후에도 후계자가 없었다. 처음부터 영조를 지지했던 세력들은 이복동생인 영조를 세자로 책봉해 줄 것을 요청하였고, 집권 4년은 당쟁의 최고점이었다. 이러한 정치적 혼란과 피 튀기는 정치는 건강을 악화시켰다. 또한 어릴 때부터 비만으로 병이 끊이지 않아 잔병을 많이 앓았다. 비만한 몸 때문에 열이 많았고 평소 분노가 심해 형언할 수 없는 병에 괴로워하다가 다시 회복되기를 반복하였다. 더욱이 그의 어머니의 죽음으로 인해 우울증 증상을 보였고 그의 건강은 갑자기 나빠지기 시작하여 며칠간 누워있다가 갑자기 죽었다. 그의 죽음에 대하여 게장을 먹고 독살당했다는 것을 포함하여 수많은 추측들이 있었지만 죽음에 대한 명확한 진상을 밝혀지지 않았다. 무덤은 서울 성북구에 위치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