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한국 역사(한국사)

선조 이연 생애와 즉위, 시대적 상황, 인물 평가

by 한국 역사(한국사) 2024. 4. 19.

선조 이연 생애와 즉위, 시대적 상황, 인물 평가

선조 이연은 한성에서 덕흥대원군의 아들로 태어났다. 임금으로 즉위하기 전에 하성군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조선 최초의 직계 혈통이 아닌 친척들 중에 왕이 된 인물이었다.

생애와 즉위

태어난 곳은 어린 시절 중종에게 받은 집이었다. 집의 터가 좋지 않다고 하여 공사를 하였는데 거의 끝나갈 무렵 우물물이 없다는 핑계를 대고 집을 바꿔달라고 애원하였다. 중종은 우물물이 잘 나오는데 이상한 말을 하며 핑계를 댄다고 마땅치 않다고 하여 공사를 마무리하였다. 집의 터가 좋지 않은 곳인 줄 알았는데 그곳에서 훗날의 왕이 태어날 것이라 생각지도 못하였을 것이다. 덕흥대원군은 선조가 8살이 되기 전에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고 명종의 지시로 복성군에게 입양이 되었다. 건강이 좋지 않아 위급한 상황이 되자 신하들은 서둘러 후계자를 지명하였다. 명종이 승하하자 선조가 즉위하여 군주가 되었다. 어떠한 준비도 하지 못한 채 어린 나이로 임금이 되었기 때문에 처음부터 매우 어려운 위치에 있었다. 자리에 올랐을 때 양어머니이자 법적으로 어머니였던 인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하였다. 하지만 단 1년 만에 그쳤고 이것으로부터 총명하다고 볼 수 있었다. 재위 초기에 정당성을 얻기 위해 낭비를 줄이고 쇠퇴하는 훈구파 대신 사림파를 끌어들였다. 외척들에 의해 심하게 폭압적이었던 내정을 장악했고 행정을 복구하려고 시도하였다. 또한 무시되었던 뇌물의 폐해를 포함하여 다양한 사회적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민생 정책을 펼쳤다. 정치적으로 사림 세력을 견제하면서 정치계를 통제하였다. 다만 총명함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즉위할 당시 16세의 나이로 계승자로서 후계자에 대한 적절한 교육을 받지 못하였다. 자리에 급작스럽게 올랐기 때문에 적극적인 개혁을 실천하기가 어려웠던 것이 분명하였다. 그 자신도 오래 지속되면서 많은 문제가 발생했음을 인식하고 있었지만 이를 제대로 바로 잡지는 못하였다. 

시대적 상황

유림들의 억울한 유혈사태로 서인과 동인의 치열한 갈등이 3년째 이어지던 중에 조선 역사상 수많은 사상자를 낸 임진왜란이 발발하였다. 한 신하의 의견으로 왜군은 수전에 강하여 절대 이길 수 없으니 육전에 주력하자는 제안이 있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에 중점을 두고 요새를 비롯한 실제 전쟁 준비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정부의 당초 예상을 뛰어넘는 너무나 많은 왜군의 대규모 진군으로 인해 패배는 계속되었다. 이러한 소식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고 왜군을 성공적으로 격퇴하고 몰아내기를 바라며 믿었던 신하에게 군대의 주력을 넘겼다. 하지만 실록에 의한 기록에 따르면 이끌 수 없는 최대의 군대의 지휘권을 부여받아 전장에 투입했지만 무모한 지휘로 싸움은 대패로 이어졌다. 수도 한양을 방어하기 어렵다고 판단한 그는 곧바로 난리를 피하여 안전한 곳으로 떠나기로 결심하였다. 회의 중에 갑자기 사라져서 운세를 점치기도 했다. 임금이 한양에서 도망친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온 친척들과 신하들에게는 도망가지 않고 한양에서 죽겠다고 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혼자 강을 건너 도망치면서 뒤를 따라오며 고생한 신하들을 가차 없이 버리는 등 매우 냉소적인 모습으로 묘사되었다. 종묘사직과 나라를 지키지 않고 본인만 살기 위해 명나라로 도주한 결과로 어떤 후폭풍을 가져오게 될지 예상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또한 여진족의 침입이 잦았는데 혼란스러운 조선의 당시 상황을 이용하여 가옥들을 불태우며 타지 않는 가옥들은 부수기도 하며 곡식을 약탈하였다. 백성들을 잔혹하게 죽이는 등 많은 위협을 가하였다. 이에 대응하여 여진족의 정벌을 빈번하게 진행하였다. 특히 조선의 지배에서 벗어나 반란을 일으킨 자들을 처벌하는 것이 주된 목표였다. 

인물물 평가

평안도에서 광해군에게 임시로 세자로 책봉한 뒤 왕의 권한 일부를 위임하여 주었다. 임진왜란의 책임을 회피하고 조정의 절반에게 정치적인 권한을 넘겨주었다. 사실 당시 임해군은 장남이었기 때문에 서열에서 차남이었던 광해군보다 우선권을 갖고 있었다. 워낙 임해군이 사이코패스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어서 취미로 백성들을 살해하기까지 했다는 일화에서 사회적 인식이 좋지 않았다. 그 결과 당연하게 세자로 책봉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임해군에게 임무를 맡겼는데 적극적이지 않은 태도로 자리에서 밀려날까 전전긍긍하였다. 결국 그는 다사다난한 삶을 마감하며 차남인 광해군을 선택하여 넘겨주게 되었다. 그의 무덤은 경기도 구리에 위치하고 있다. 임진왜란 때의 처참한 처사로 국민들로부터 큰 미움을 받는 임금이었다. 사실 임진왜란 때의 과오만으로 비난을 받는 것도 있지만 당시 기이한 행동은 이해할 수 없었다. 무책임한 면모와 이순신 파면 등 전시의 무능으로 인해 국가 지도자 결격 사유로 전반적인 여론이 긍정적이지 않았다. 이미지는 최악이라고 할 수 있었다. 노비 인구의 증가와 토지 침탈 그리고 조정의 문란 등 중종 때부터 계속된 민생 문제에 대한 개혁 담론이 활발하게 논의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쨌든 그의 한심한 추진력과 무원칙한 성격이 자기 잇속만 차리는 행동으로 제대로 된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물론 부정적인 면만 있는 것이 아니라 긍정적인 면도 있었다. 조선 건국 이후 체제의 모순이 누적되어 왔고 각지에서 다양한 병폐가 발생하고 있었다. 이에 대한 공론화가 점차 시작되었고 특히 기여 제도와 관련하여 율곡 이이 등의 신하들이 대동법의 원형인 수미법을 제시하였다. 농업 국가라는 한계에서 적절한 정책이라며 관심을 보였다. 이렇듯 옹호하는 일부 사람들은 전쟁이 없는 태평성대가 있었다면 국가 지도자로서 필요한 능력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노력으로 군주로서의 자질을 갖추어 많은 업적을 남겨 더 나은 왕으로 기록되어 전해졌을 것이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