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명종 이환은 선왕이자 이복형이었던 인종이 후사가 없었기 때문에 뒤를 이었다.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 조선의 13대 왕으로 즉위하였다.
역사적 배경
태어나기 전 역사의 흐름을 거슬러 가보자. 성종 때 싹튼 훈구파와 사림파 사이의 대립 속에서 단순히 양쪽의 대립 차원을 넘어 양반관료층의 분열과 권력투쟁으로 발전해나가고 있었다. 중종의 아내였던 장경왕후와 문정왕후는 같은 파평 윤씨 가문 출신이었지만 왕위 계승을 놓고 민감한 갈등을 겪었으며 둘러싼 암투는 더욱 치열해졌다. 나라의 통치자가 되고 권력을 잡기 위해 서로 다투었는데 이때 윤임파를 대윤, 윤원형파를 소윤이라 불렀다. 당시 인종이 세자로 있을 때 문정왕후가 표면적으로는 지지하였지만 아들을 낳자 분위기가 바뀌었다. 왕위에 올랐을 때 윤임은 권력을 잡았고 사림의 많은 유명 인사들을 임명함으로써 탄력을 얻었다. 장경왕후의 오빠인 윤임은 문정왕후가 아들을 낳으면서 임금을 몰아내고 아들을 세자로 책봉하려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이에 대비하여 보호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문정왕후와 갈등으로 이어졌다. 그는 형제가 많았는데 그중 차남으로 왕위 계승의 전통성을 보면 왕위에 오르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중전의 신분을 가지고 있었던 문정왕후의 자식이었기에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 오늘날 30대 중반 나이에 출산을 하면 노산이라고 하는데, 조선시대에는 평균 결혼 연령이 낮았기 때문에 30대라고 하면 손자 혹은 손녀를 낳았었다. 그러한 사회 환경 속에 문정왕후는 30대의 나이로 그를 낳은 것이다.
재위 기간 중 혼란
당시에는 수많은 정치적인 혼란 속에서 이루어졌고 왕위에 오르고 상황은 크게 바뀌었다. 한 나라의 임금이 되었지만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어머니인 문정왕후가 수렴 청정하여 정부를 지배하면서 외삼촌이 권력을 잡았다. 외삼촌인 윤원형은 인종이 사망할 당시 윤임이 계림군을 세우려 했다는 소문을 퍼뜨렸다. 그러면서 윤임이 조차인 봉성대군에게 왕위를 이양하려 했다고 누명을 씌웠다. 이를 빌미로 문정왕후에게 숙청을 강요하였고 윤임을 비롯한 사림파는 사형에 처하고 그들의 가족들은 유배를 가게 되었다. 실권을 장악한 어머니와 외삼촌에 대한 비판과 견제하기 위한 시도로 문정왕후가 나라를 망친다는 벽서의 글을 계기로 발판 삼았다. 잔재들을 모두 숙청하기 시작하며 파벌 싸움은 멈추지 않았다. 권력을 잡은 윤원형의 일파의 부패는 막대하였으며 불교의 부흥은 백성들의 적개심을 불러일으켰다. 이때 유명한 인물인 임꺽정은 많은 활약을 보였다. 왕의 자리에 있는 동안 배의 수가 감소하여 어려움을 겪고 있던 일본군이 전라도 지역을 침략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때 판옥선이 등장하는데 당시 아주 혁신적인 군선이었다. 그러나 격퇴시키며 대승을 거두었다. 중종 때 군사 기관이자 임시 기관으로 존재하였던 비변사가 상설 기관이 되었고 청사를 신축하였다. 이 시기의 비변사는 군사 업무를 관장하는 관청으로서 한계가 있었다. 또한 연산군의 횡포와 중종의 실정은 조선의 재정에 막대한 타격을 주었고 이는 재정난으로 이어졌다. 더 이상 줄 땅이 없어서 종전의 법을 폐지해야 했다. 긍정적으로 보면 공신과 대신들의 토지 이용이 공식적으로 중단되었다. 차분히 보면 연산군과 중종 때의 혼란으로 기존의 토지가 사유화 및 무소화되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러나 이 조치는 국고를 일원화하고 관료들은 더 이상 명목상으로도 국가로부터 토지를 받지 못하였다. 이는 고대에 토지와 백성을 지배하던 귀족들을 포용하여 시작된 한반도의 관료 체제가 직업적인 것으로 완전히 바뀌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망과 후손
문정왕후가 퇴위한 후 권력을 잡았는데 윤원형을 견제하고 왕권을 안정시키기 위해 그의 아내의 삼촌인 이량을 주요 관직에 임명하였다. 그러나 이량과 그 중심으로 권력을 잡은 신하들은 왕의 신뢰를 등 업고 파벌을 만들고 횡령을 저질렀다. 수렴청정을 거두겠다고 선언하였을 때 얼굴을 바닥에 박아 엎드려 울며 이를 거절하였다. 신하들에게 말리지 않은 것에 크게 꾸짖었다. 다만 왕실의 최고위층 사람의 정계 은퇴를 공식적으로 반대하지 않는 것은 실례라고 생각되는 시대였다. 은퇴를 반대하는 것은 당시에 걸맞은 예의의 문제에 불과하였다. 결국 정치에 관여하기 시작한 후 문정왕후가 사망할 때까지 20년이라는 시간 동안 자신의 권력 기반이 없었다. 오롯이 윤원형의 횡포 속에서 왕위를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시간이 흘러 윤원형을 추방하고 인재를 영입하여 정치를 운영하려 하였으나 실행에 옮기지 못하였다. 그중에서 유일한 업적으로는 경복궁을 복원한 것과 경국대전의 추상적 성격을 보완하였다. 충분성을 확보하기 위해 권위 있는 해설서를 간행한 것이다. 조선 전기의 법제도를 마무리한다는 점에서 아주 큰 의미 있는 성과라고 할 수 있다. 중병으로 이미 말을 제대로 할 수 없을 정도로 병세가 급속히 악화되어 지속된 이질과 과도한 스트레스로 경복궁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유일한 아들인 순회세자가 일찍 요철하여 뒤를 이을 후사가 없자 이복 조카인 하성군인 선조를 다음 왕으로 자리를 넘겨주었다. 이로 인해 조선 왕실의 적통 직계는 이때 끊기게 되었다. 태조로부터 내려오는 왕계가 완전히 끊어져서 현재 생존해 있는 수백만의 전주이씨 중에는 왕계의 직계 후손이 한 명도 없다. 그의 묘는 서울 노원구에 위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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