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종 이역은 공신과 대신들을 적극 활용하였다. 도교 사상을 바탕으로 도덕 질서를 회복하는 방향으로 명분과 권위를 확장했다.
왕위 계승
세자 시절 연산군만 아니면 누구든 상관없다는 것이 당시 상황이었다. 연산군의 이복동생인 그는 반정부 세력의 정치적 의도로 인해 자신의 의사에 반하였다. 그래서 손에 피 한 방울도 묻히지 않고 왕위에 올랐다. 잠에서 깨어나 보니 왕이 된 것이다. 일부 세력의 주축으로 일으킨 반정 덕분에 조선의 11번째 왕이 되었으며, 갑자기 왕이 되었기 때문에 어떻게 나라를 통치할 것인지에 대한 비전이나 목표가 없었다. 한마디로 미래가 어두웠을 것이며, 집권 초기 반정부 공신들의 영향으로 인하여 제대로 실용적인 권력을 크게 행사하지 못하였다. 한편, 전 임금의 횡포로 악정을 개혁하고 무질서해진 나라의 기강을 바로잡기 위해 노력하였다. 폐지되었던 모든 법령이 복권하였고 왕에게 자문을 담당하던 기관을 대폭 기능을 강화하였으며 신하들의 월례 및 전시와 사료를 복원하였다. 성균관을 개축하며 희생된 이들의 삶을 회복시켰다. 나라의 선량한 풍속과 도의를 기르기 위해 미신 타파를 하였다. 왕실 정치를 이용하여 신하들의 세력 확장을 억제하려 하였으나 신하들의 힘이 강해 성공하지 못하였다. 점차 공신들의 세력이 강화되고 왕보다 더 많은 권한을 행하려 하자 젊은 혈기로 대간의 구성원들을 모두 교체하였다. 세력을 확장한 훈구파를 견제하기 위해 다시 사림파를 임명하였다. 당시 개혁을 원했던 의견에 동조하여 교체된 신하들과 함께 파격적인 개혁에 착수하였다. 대표적으로 향약과 현량과 등이 있었다. 농촌 사회에서 유교를 바탕으로 한 자치 규율을 확립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학급이나 학교 차원에서 학생 자치 규정과 비슷하다. 또한 공무원 시험제도가 아닌 추천을 통해 인재를 선발하자는 것이었다. 과거 시험제도는 시험 위주여서 사람의 인품이나 덕목을 검증할 방법이 없기 때문에 추천제도를 통해 사람을 선별하여 뽑자는 뜻이다. 그들은 과거제도의 폐해를 지적하고 개선방안으로 추천제도를 제안하였다.
사건과 혼란
임금의 자리에 있는 동안 너무 빠른 개혁은 오히려 역풍을 불러왔다. 보수 기득권층인 훈구파의 엄청난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개혁의 칼이 훈구파를 겨누면서 사림파와 훈구파의 대결은 더 이상 피할 수가 없었다. 훈구파는 자신들의 자리를 뺏기지 않기 위해 맹렬히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훈구파와 사림파의 갈등으로 싸움이 격화되어 옥중에서의 죽음, 저주와 주술, 익명의 편지, 무고 등이 빈번하게 발생하였다. 문제는 대표적인 신하 조광조의 지나치게 급진적이고 앞선 개혁에 부담을 느꼈다. 공로패를 삭제하는 사건이 있었는데 계기로 반역으로 생각을 하고 결국 조광조와 신진사류를 내동댕이쳤다. 이것 때문에 조광조를 포함한 많은 새로운 신하들이 유배되었다가 처형되었는데 이 사건을 기묘사화라고 불렀다. 조광조가 좋은 일을 많이 하려고 노력했지만 그는 이상하게 죽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이렇듯 어떤 주목할 만한 업적을 남기지 않았다. 유일하게 다양한 서적이 편찬·출판되었으나 기묘사화 이후 문화발전 정책은 거의 중단될 지경에 이르렀다. 조광조를 비롯한 급진 사림파가 몰락한 뒤 이들을 견제할 힘이 사라지면서 공권력이 불활 할 조짐을 보였다. 사림파가 몰락하면서 현량과는 폐지되었고 공직에서 물러났던 훈구파는 다시 복권되고 장물은 모두 회수되었다. 공권력의 집중을 차단하기 위해 외척들을 임명하였다. 처음에 그들에게 훈련 지휘관으로 임명하고 수도의 중요 직책을 맡겼다. 그러나 외가 세력은 또 다른 세력을 형성했고 점차 극에 달하여 전쟁의 소용돌이를 만들었다. 새로운 세력이 등장하였고 집권 중후반에는 외척과 반관의 권력 다툼으로 크고 작은 사건·사고들이 연이어 발생하여 혼란기를 맞았다.
승하와 묘
뜻하지 않게 갑작스럽게 왕위에 올라 즉위 초반에 권력의 힘이 약했다. 이로서 왕위에 있는 동안 반정을 통해 군주가 되었던 그는 다음 왕의 즉위를 세자인 인종에게 넘겨준다는 의사를 밝혔고 다음날 승하하였다. 그의 무덤은 원래 경기도 고양시에 있었다. 원래 무덤은 풍수지리상 위치가 좋지 않았고 장마철이 되면 홍수 문제가 너무 심해서 비가 조금이라도 오면 사찰에 물이 넘쳤다고 한다. 또한 임진왜란 때 무덤이 파헤쳐지고 불에 타 훼손이 되었으며 당시 시신이 발견되었으나 그 시신이 누구의 것인지 아닌지를 확인할 수 없었다. 판단하기 위해 원로 대신부터 여러명의 궁인들까지 모두 동원하여 검안하였다. 그러나 세상을 떠난 지 오래되어 그의 모습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드물었고 남아 있는 사람들도 나이가 많아 확인하기가 어려웠다. 모습을 기억하는 몇몇 사람들의 몽타주 기록에 따르면 키가 크고 체격이 평균적이었으며 수염은 그다지 많지 않지만 너무 적지 않았고 수염 색깔도 노란색이었고 한다. 이마에는 녹두보다 작은 검은 사마귀가 있었고 눈이 길고 눈썹은 약간 엉켜있었다. 턱 끝은 약간 곡선을 그리며 각이 있었고 코는 높고 길었지만 약간 곡선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시신의 모습은 비대하고 키는 짧아 남아 있는 모습의 기록과는 전혀 달랐다. 세상을 떠났을 때는 무더운 여름이었고 시신이 부패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었다는 점은 과연 이 시신이 누구의 시신인지 의문을 자아냈다. 하지만 후에 모습이 이러할 수도 있다는 의견 때문에 현재 서울 강남구에 옮겨져 지금의 위치에 다시 지어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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