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종 이혈은 세종과 세조 때 확립된 조선 전기의 문화 제도를 교육과 문화 진흥에 주력하여 완성한 것으로 평가된다. 관학 진흥과 편찬 사업을 통한 문단의 진흥도 중요한 성과를 보였다.
생애와 일화
세조의 장남인 의경세자 이장과 한확의 딸 소혜왕후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어릴 때부터 자질이 뛰어났다. 관대했으며 학문을 좋아하였고 서예와 그림에 능하여 예술적인 기질이 많았다고 한다. 시를 좋아하고 매사냥도 즐겼다고 하며, 총명하였고 행동이 매우 차분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정신과 학식이 뛰어날 것이라며 칭찬과 애정을 받으며 세조의 사랑을 특히 듬뿍 받으며 궁궐에서 지냈다. 한 일화가 있는데 어느 날 천둥번개가 치는 바람에 옆에 있던 환관이 벼락을 맞고 숨졌다. 모두가 의식을 잃었는데 얼굴이 변하지 않는 것을 보고 태조와 닮았다고 하였다. 그의 아버지는 20세의 나이로 요절하였고 세조의 둘째 아들인 예종도 임금이 된 지 14개월 만에 죽었다. 훈구 장관의 유언에 따라 형 월산군이 허약하다는 이유로 대신들과 상의하여 즉위시켜 자리에 올랐다. 임금이 되었을 때 그의 나이는 겨우 13살이었다. 그러므로 그의 할머니 윤씨가 수렴청정의 섭정을 맡았다. 어린 나이에 군주가 된 후 재위 초기에 9명의 원로 대신들의 재상으로 정책 결정에 자문자로 참여하였다. 실질적으로 국정에 영향을 미치지지 못하였으며, 합법적인 장남과 그의 형을 뒤로하고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정치적 입지는 매우 좁았다. 할머니의 섭정 기간은 7년이었는데 그동안 낮은 자세를 유지하며 때를 기다렸다. 스스로 정부를 시작한 후 그의 정부가 시작되자 그간 쌓아온 지식과 경험을 토대로 정치를 하였으며 많은 업적을 쌓았다. 한명회의 딸 한씨와 결혼했지만 그녀가 후계자를 남기지 않고 죽었다. 그래서 봉상시 판관을 지낸 윤기균의 딸 윤씨를 선택하여 왕비로 책봉하여 두 번째 혼인을 맺었다. 그러나 질투심이 많은 윤씨는 많은 문제들을 일으켰다. 결국 자리에서 쫓아내고 후궁이었던 숙의 윤씨를 세 번째 부인으로 맞이하였다. 이렇게 3명의 부인과 수많은 후궁들을 거느리고 사이에서 20여 명의 자녀들을 두었다.
정치 방법
그는 승려 법을 폐지하고 승려를 엄격하게 통제하였다. 사찰을 폐쇄하는 등 철저하게 불교와 유교를 탄압하는 정책을 펼쳤고 법규 개선에 힘써 유교 통치 질서의 기반을 확립하였다. 불교를 배격하고 심지어 승려들에게 복이 있어야 한다는 향시의 답안을 작성한 유생의 유배를 명하였다. 불교 경전의 역사보다는 성리학에 정통성을 강조하였다. 경국대전을 완성하여 공포하였고 더욱 보완하여 대전속록을 발간하였다. 문신 중에서 덕과 재능을 갖춘 인물을 선발하여 직무를 쉬게 하여 학문에만 전념하게 하였다. 또한 서적의 발간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자주 강연을 통해 학자들과 토론을 하고 학문과 교육을 장려하였다. 압록강과 두만강 주변의 여진족을 탄압하였다. 이듬해에는 함길도 지역에 신하를 파견하여 여진족의 침입에 대비함으로써 북방 방어에도 힘썼다. 그는 또한 전접제 시행에 따른 토지 세습, 병무 겸업, 관리들의 수탈을 막기 위해 관치제도를 실시하여 민생의 안정을 도모하였다. 벼슬아치에게 직접 공물을 지급하게 하고 관리들에게 현물을 지급하게 하였다. 여주의 영릉에 경의를 표하고 왕래하는 연로와 현의 세금을 반으로 줄였다. 수령과 총사령관을 임명할 때 직접 그들을 관찰하고 백성들의 통치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 줄 것을 당부하였다. 또한 백성들의 원한과 고통을 고려하여 형벌을 가볍게 하고 건국 이래의 규제를 완화하였다. 그는 공신들을 중심으로 한 훈구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새로운 많은 사림 세력을 등용하였다. 근왕 세력으로 기용하여 훈신과 사림의 세력 균형을 이루도록 함으로써 왕권을 확보하게 되었다. 그리고 홍문관이 예문관에서 다시 분리되어 자리를 지키는 정치 조직으로 거듭났다. 과감하게 신인을 발탁하여 권력 강화를 위한 정치적 기반을 넓히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조선 중기 이후 사림 정치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말년과 승하
동물을 좋아하여 사슴, 개, 고양이 등 궁궐의 후원에 데려다 기르기도 하였다. 동물들을 기르는데에 신하들의 반대가 많아서 자주 의견충돌이 있기도 하였다. 그의 집권 말기 가을에 폐결핵과 천식 등의 폐질환으로 피로, 감기, 두통으로 병상에 눕게 되었다. 그가 병상에 누워있는 동안 갑자기 배꼽 아래에 종기가 생겼고 이것은 급격히 악화되었다. 그는 죽기 직전에 큰 사면령을 했지만 그의 상태는 나아지지 않았다. 후유증으로 재위 25년에 38세의 나이로 사망하였고 묘호는 그가 조선의 모든 법적 체계와 제도를 완성했다는 것을 상징하였다. 치세로는 문화의 황금기라 불리며 이 앞전에 쌓아온 왕들의 업적을 바탕으로 찬란한 문화정책을 펼쳤던 시기이다. 덕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다른 묘호로 지정되어야 한다고 여러 번 주장했지만 결국 현재 불리는 성종으로 주어지게 되었다. 그는 사후 100년 동안 아내의 죽음에 대한 문제는 언급하지 않겠다는 유언을 남겼다. 그러나 이 유언은 지켜지지 않고 한 신하에 의해 거론되어 후에 연산군은 모친의 비참한 죽음을 알고 분노하였다. 폐위된 어머니에게 독약을 먹인 자를 살해하는 사건으로 이어졌다. 연산군이 횡포를 부린 이유 중 하나는 이때 사림파가 유언을 지적하며 폐위된 윤씨의 숭상에 적극적으로 반대한 것이다. 이렇듯 정사에 있어서는 성군으로 불릴 만큼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 한편 가족이나 여자관계에 있어서 만큼은 부족한 면이 있다는 부정적 평가가 있다. 사후 선릉으로 광주에 있었으나 이전하여 현재 서울 강남에 위치한 무덤에 두 번째 부인인 정현왕후와 함께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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