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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역사(한국사)

예종 이황 세자 시절, 재위 기간 동안의 사건, 승하와 인물 평가

by 한국 역사(한국사) 2024. 4. 13.

예종 이황 세자 시절, 재위 기간 동안의 사건, 승하와 인물 평가

예종 이황은 아버지인 세조와 어머니인 윤씨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차남으로 둘째 아들이다. 조선의 역대 군주 중 자연사로 볼 때 가장 짧은 수명을 가진 군주이며 동시에 가장 짧은 재임 기간을 가진 임금이다. 

세자 시절

그의 아버지가 즉위한 후 해양대군으로 임명되었고 그의 형이 젊은 나이에 사망하자 세자로 임명되었다. 사실 왕위 계승은 법칙에 위배되었다. 원래 법체계에서는 장남에게 넘어간다. 즉, 형이 일찍 죽었으니 조카가 승계권을 받아 이어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왕의 전통성으로는 적장자의 적장자로서 왕위 계승이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에 한 나라의 임금이 되기에는 거리감이 있었다. 그런데 어떤 이유에서인지 세조는 장남을 후계자로 내세우고 승계권을 주는 대신 그를 세자로 책봉하였다. 형이 정신질환 등 심각한 결격사유가 있었던 것은 사실일 수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았다는 의견이 갈리며 나이로 보아도 불과 4~5살 차이밖에 나지 않았다. 손자가 아닌 자신의 둘째 아들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즉위한 지 하루 만에 죽었다. 하지만 왕위 계승 문제를 확실히 하기 위해 생전에 임금의 자리를 물려준 것은 그만의 예이다. 이것은 우려가 없었다는 의견도 있다. 종교의 법에도 어긋나는 행동이었지만 당시는 물론 후대에도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당시 신하들보다도 국정 장악력이 강했으며 의사소통도 잘했기 때문에 특별히 이 점을 지적하지 않았다. 그럴 것이 평소 가족들을 매우 총애하였고 장남의 장례를 화려하게 치렀음과 동시에 궁궐을 나와 사가에 거주하는 가족들에게도 깊은 관심을 보였다. 재임하는 동안 총명하였지만 조용히 있었고 특별히 자신의 의견을 내세우거나 밝히지 않았다. 여론을 존중하고 단독으로 정무를 이끌지 않는 왕이 될 것이라는 기대가 높았다. 삼포에서 일본과의 개별 무역을 금지하였고 또한 막사에 딸린 논과 밭은 일반 농민이 농사를 지을 수 있도록 하였다. 

재위 기간 동안의 사건

임금의 자리에 올라 있는 재위 기간 중에 아직 어린 나이지만 처리해야 할 정치적 문제가 많았다. 그의 최우선 과제는 선대왕이 일으킨 쿠데타를 방조하여 중앙정치에 등장한 훈구 대신들을 견제하는 것이었다. 총애를 받아 실세로 떠오른 구성군과 태종의 외증손자인 남이 등 왕실 친척들의 영향력도 젊은 왕에게 큰 부담으로 작용하였다. 또한 난을 진압하면서 성장한 무신들도 우려의 대상이 되었다. 재위 기간 동안 왕권 강화의 명분으로 친척들의 세력을 이용하였다. 원래 종친이 정치에 관여해서는 안 되는 것으로 고려 때부터 계속된 관행이었다. 특히 고려에서는 아무리 가문의 자질이 뛰어나도 과거시험에 응시할 수조차 없었다. 이러한 전통은 조선에서도 이어져 종친의 정치 참여는 제한적이었다. 그럼에도 구성군과 남이는 높은 관직 자리에 있었다. 이들의 성장은 정부 운영에 몰두했던 예종에게 큰 부담이 되었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왕실의 권력을 제거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던 시기에 남이는 훈구 대신들은 감찰관 자리에 적합하지 않다고 주장하였다. 항상 그를 못마땅하게 여겼던 그는 이를 받아들여 남이를 감찰관 자리에서 해임하여 차관으로 임명하였다. 어느 날 혜성이 나타나자 남이가 혜성의 출현은 지난 옛 것을 몰아내고 새것을 받아들이는 징조라고 말하였다. 이는 새로운 왕조가 등장할 것을 예고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 말을 신하중에 한 명이 우연히 듣고서 역모를 꾸미고 있다며 보고하였다. 남이의 측근이 방어 계획을 논의하고 있을 때 이와 같은 모임은 배신이 일어난 것이라는 신호로 여겼다. 이 사건으로 관련된 모든 사람들이 심문을 당하였다. 직접 국문을 지휘하였고 결국 남이는 모든 것을 인정하였다. 선왕 때부터 남이의 행동에 불만을 품고 있던 그는 이 계기를 이용해 역모를 꾀하였다는 죄목으로 남이를 제거하였다. 

승하와 인물 평가

세조 말년에 대리 행정을 수행하여 사망하기 전에 후계자로 즉위하였지만 건강은 어려서부터 좋지 못하였다. 불과 1년의 재위 기간 만에 젊은 나이에 갑자기 사망하였다. 자신도 강한 위기감과 사명감에 사로잡혔고 이 때문에 짧은 재위 기간 동안 무리하게 여러 일을 이끌어야 했기 때문에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지쳤던 것으로 생각한다. 추측한 정확한 사인은 발에 세균이 침투하면서 봉와직염으로 발전하였고 이 병으로 인한 패혈증이 악화됐기 때문이라고 본다. 패혈증의 증상으로는 세균에 의해 몸의 조직에 혈액이 제대로 공급되지 않아 피부가 멍이 들 듯 파랗게 변하거나 죽는 경우가 있다. 아버지 세조는 공신들을 우대하여 위상을 높여주었지만 왕권에 대한 어떠한 도전도 용납하지 않았다. 강력한 권력을 휘두르는 모습에 감명을 받아 왕권 강화에 힘을 썼다. 또한 그는 강력한 권력을 바탕으로 백성들을 위한 정치를 시행하려는 것으로 보였고 그러한 정책을 추진할 수 있는 충분한 능력과 배짱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 역사보다 훨씬 오래 살고 즉위 직후 왕위에 오랫동안 머물렀다면 훨씬 더 훌륭한 임금으로 평가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를 옹졸하고 수상한 왕으로 대중의 이미지가 강하며 비윤리적인 행동을 했던 아버지를 지나치게 찬양한다는 이유로 윤리적인 측면에서 비판을 받았다. 물론 충효와 효의 개념이 강했던 시기였고 최고의 효심을 갖는 것이 나쁜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 점을 감안하더라도 당시 백성들과 귀족들에게 충격을 주는 끔찍한 행위를 저질렀음에도 아버지를 지나치게 찬양하였다. 가장 젊은 나이에 아들을 일찍 낳은 왕이기도 하며, 그의 무덤은 경기도 고양시에 위치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