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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역사(한국사)

세조 이유 왕위 수탈, 정치와 업적, 승하와 인물 평가

by 한국 역사(한국사) 2024. 4. 12.

세조 이유 왕위 수탈, 정치와 업적, 승하와 인물 평가

세조 이유는 아버지인 세종과 어머니인 심씨 사이에서 태어난 차남으로 형제들 중 둘째 아들이다. 만약 그가 둘째 아들 대신 장남으로 태어났더라면 조선왕조에서 가장 비극적인 사건의 주인공이 되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왕위 수탈

장남으로서 글과 서예에 뛰어나 헌신했던 문종과는 달리 문학문보다는 무술에 뛰어났으며 거침없고 열정적인 사람이었다. 초부터 야심이 있다는 소문을 숨기기 위해 철저하게 왕위에 대한 뜻이 없다는 것처럼 행동하기도 하였으며 계속해서 사냥과 활쏘기 등을 즐겨하였다. 수양대군으로 더 잘 알려진 그는 원래 다른 이름이었다. 그의 이름을 바꾼 사람은 아버지 세종이었다. 병든 문종과 어린 단종을 보면서 오랫동안 수양대군의 존재에 대해 걱정하였다. 문종이 죽고 단종을 성왕으로 만들기 위해 주나라의 공작처럼 되기를 바랐지만 수양대군은 다른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왕권 찬탈을 계획하여 구체적으로 실행에 옮겼다. 아버지의 병약한 시기를 기회로 삼고 정치에 참여할 수 있었다. 분위기만 살펴볼 뿐 신하들을 자신의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인재들을 포섭하며 주요 신하들을 구축으로 인맥만 형성하였다. 즉위한 후 그의 재임 기간 동안 수많은 어려움에 직면했다. 재임 초기는 불안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러한 어려움은 주로 그의 정당성에 대한 의문에서 비롯되었다. 왕위를 찬탈한 자리는 명분의 약화는 언제든지 다음 왕으로 교체로 이어질 수 있었다. 집현전 출신의 젊은 학자들은 왕위 찬탈을 비판적인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으며 젊었기 때문에 활기찬 유학자들처럼 그들은 명분을 중요하게 여겼다. 게다가 임금이 된 후 정치적 중심이 측근들에게 이양되면서 그는 소외되었다. 하지만 그는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목표를 가지고 아버지의 위업을 본받아 많은 업적을 남기기 위해 노력하였다. 대군이었을 때 아버지인 세종의 명령을 따랐고 궁궐에 불교 사찰을 설치하는데 적극적으로 협력하였다. 또한 사찰의 스님과 함께 불교 문자를 편집하였고 지역 음악의 악보도 정리하였다. 

정치와 업적

첫번째로 의정부의 정책결정권을 폐지하고 재상의 권한을 축소하여 육조 직계혈족제를 부활시켜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방법을 선택하였다. 유향소가 설치되었고 도청을 폐지하고 도호의 권력을 약화시켜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하였다. 두 번째로는 호적과 호적제도를 강화하고 진구안제도를 실시하였다. 전국을 방위체제로 정비하고 중앙군을 5등으로 배치하는 등 국방력을 높이는 데 힘썼다. 또한 북벌을 실시하여 두만강 건너 야인을 제거하게 하고 서정을 출범시키는 등 북방 개척에도 주력하였다. 지안주의 야만족을 제거하는 등 서북 개발에 힘쓰는 한편 서북지역 개발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평안도, 강원도, 황해도 등지로 민간인을 이주시키는 정책을 펼치며 국토의 균형 발전에 힘썼고 지방 정부 제도를 실시하였다. 세 번째는 과전법의 모순을 시정하기 위해 과전법을 폐지하고 현직자에게만 토지를 제공하여 국가수입을 증대시키는 전기법을 실시하였다. 또한 왕후와 세자빈에게 양잠을 권장하기 위해 궁궐에 댐실을 설치하고 농업 서적을 발간하여 농업을 진흥하였다. 네 번째는 성삼문을 비롯한 집현전 학자들이 단종복귀운동에 참여하자 집현전은 폐지되었다. 그러나 문교면에서도 활동하며 제도를 정비하고 많은 서적을 편찬하였다. 건국 이후 교리와 판례를 종합적으로 정비하여 법전을 제정하기 위하여 완성된 법령을 편찬하도록 신하들에게 명하였다. 그는 불교를 숭상하였으며 간경도감을 제정하고 연화경과 금강경을 반포하며 또한 공물공납 금지를 거듭 밝히고 문무에 힘을 쏟았다. 다섯 번째 외국과의 관계에 있어서는 일본에게 물자를 지원하여 달라고 하였으며 장군들을 보내 제압하고 처벌하기도 하였다. 또한 명나라의 요청에 따라 국위를 선양하기도 하였다. 그는 정치 운영이 있어서 부하의 의견을 수용하는 이른바 하향식 의사소통 방식이 아니라 자신의 소신만을 집행하는 상향식 방식을 택하였다. 

승하와 인물 평가

병을 앓던 중에 거듭된 악몽과 불면증에 시달렸고 정신병적 망상은 더욱 심해졌다. 호전될 기미가 보이지 않자 자신의 건강이 점점 악화되고 있음을 깨달았다. 신하들을 불러 세자인 예종을 잘 보살펴 달라고 부탁한 후 이튿날 세상을 떠났다. 그의 묘는 오늘날 경기도 남양주에 위치하고 있다. 왕이 죽으면 왕실의 사당인 종묘에 영패를 모신다. 제사장이 종묘에 들어갈 때 그 업적을 기리기 위해 이름을 붙이는데 이를 묘호라고 한다. 역대 군주들의 묘명에서 알 수 있듯이 조선시대 왕들의 묘명은 두 글자로 작성되었다. 첫 글자는 왕의 업적을 나타내고 두 번째 글자는 민법상의 신분을 나타낸다. 조는 주로 나라를 건국한 자에게 주어졌던 칭호이며 그 뒤를 이은 나머지 후대 왕들은 종을 사용한다. 세조의 경우도 원래 종으로 묘호를 주장하였는데 무덤 이름은 후계자인 예종의 주장에 따라 조로 결정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사실 나라를 개국한 자가 아닌 후계자였기 때문에 조가 아닌 종을 사용하는 것이 정확하다. 그럼에도 나라를 개국하여 계승함을 뜻하는 단어를 모두 소유한 왕이 되었다. 이는 후대에 과도하게 이름을 부여한 결과로 볼 수 있다. 비록 세조라는 묘명은 직접 지은 것은 아니지만 그의 유별난 이력과 무관하지 않다. 특별하게 하는 것은 그의 묘명뿐만이 아니다. 신하들은 나라를 재건하는 데 공적을 인정받았고 아무리 그 수가 바뀌어도 종묘에서 위패가 옮겨지지 않는 비일시적 인물의 지위를 가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