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한국 역사(한국사)

단종 이홍위 생애와 즉위, 위기 시작, 말년과 음모

by 한국 역사(한국사) 2024. 4. 11.

단종 이홍위 생애와 즉위, 위기 시작, 말년과 음모

단종 이홍위는 16살의 어린 나이에 비극적으로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비운의 소년 군주라고 불린다. 조선 임금들 중 유일하게 종묘를 거치지 않고 영령전에 봉안되었다. 

생애와 즉위

조선의 6대 왕으로 문종과 현덕왕후의 장남이다. 그가 태어난 날부터 그의 미래를 예견하는 것 같은 불길한 일이 었었다. 태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할아버지인 세종은 매우 기뻐하였다. 그리고 2급 이하의 모든 죄수들을 사면하는 위대한 사면 문서를 출판하였다. 이 문서를 다 읽기도 전에 조각상 근처에 있던 큰 양초가 땅에 떨어졌다고 한다. 불길한 예감이 들었는지 그 양초를 즉시 제거하라고 명령하였다는 일화가 있다. 이것은 불행의 징조였는지도 모르겠지만 친모였던 권씨 현덕왕후가 출생 직후 산후 합병증으로 사망했다. 할아버지 세종과 할머니 소헌왕후도 어릴 때 사망했으며 마지막 남은 직계 후손인 아버지 문종마저 지병의 재발과 악화로 세상을 떠났다. 이전에 형제 두 명이 있었지만 어릴 때 다 사망하여 외아들이 되었다. 문종이 건강이 악화되고 있다는 것을 알고 만일의 경우를 대비하여 죽기 전에 몇몇 신하들에게 임금으로 만들어 보위를 이을 수 있도록 부탁하며 신신당부하였다. 이러한 부분에서 볼 때 이렇게 임금이 신하들에게 요청했을 정도로 이 당시 왕실의 기반이 실제로는 취약했던 것을 알 수 있다. 어렸을 때는 매우 총명했다고 한다. 10살의 어린 나이에 누구의 보호도 받지 못한 채 왕위에 올랐고 원로 대신들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대대로 내려오는 혈통을 가진 아들로 태어난 유일한 군주이며 역대 모든 왕들 중에서 가장 완벽한 전통성을 가진 왕이다. 아버지 문종은 장남이었고 자신 또한 장남이었다. 정실부인에게서 낳은 장남으로 태어날 때부터 당연하게 원손으로 시작하여 나중에 세자 그리고 임금을 연달아 이은 조선의 유일한 왕이다. 

위기 시작

할아버지인 세종때부터 태평성대를 이어온 상대적인 이면에서는 아버지인 문종의 몸이 지나치게 너무나 허약했다는 것이다. 오랫동안 신임을 받으며 성장해 온 문인 세력이 전체적인 정사를 좌지우지했던 것도 있다. 많은 뇌물을 받거나 부당한 방식으로 정치를 하는 등 이러한 점은 결국 허점이 되어 수양대군이 난을 일으킬 수 있게 하는 명분을 주게 되었다. 그리하여 임금의 자리에 즉위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수양대군이 왕위를 찬탈하고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난을 일으키게 되었다. 완벽한 정당성과 능력을 두루 갖추고 있었으며 폭정이나 실정을 저지른 적이 없었다. 따라서 그 누구도 난을 일으킬 명분이 없었다. 그러나 조부모와 부모를 대신하여 보호해야 할 처지에 있던 궁인들을 죽이고 대표적인 신하들도 무참히 살해하였으며 귀양을 보냈다. 특히 당시 조선 사회는 안정기에 접어들었고 성리학이 본격적으로 확립되어 있었기 때문에 많은 반대에 부딪혔다. 그 결과 세조의 정통성은 후에 조선의 기득권을 쥐게 된 사림파에 의해 비판을 받게 되었다. 비극은 아버지의 이른 죽음과 자신의 의지를 완전히 다하기도 전에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다는 사실에 있다. 어린 나이에 군주에 올랐다면 보통 어린 군주가 성숙해질 때까지 정치적인 보조 역할을 하는 왕비나 어른이 있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엄마인 왕비나 할머니인 왕후가 먼저 세상을 떠났고 그를 지지해 주거나 보조 역할을 해줄 수 있는 어른이 없었다. 즉위 1년 만에 숙부 수양대군이 계유년에 난을 일으켜 권좌에 오르자 반강제적으로 실권을 박탈당하게 되었다. 상왕으로 폐위되어 왕위를 뺏기게 되었다. 유교 이념에 반한 조선의 성리학에서는 무력과 강요에 근거한 정변과 그로 인한 강제 침탈, 사사로운 일들을 용납할 수가 없었다. 겪은 이 모든 굴욕에 대해 명분이 없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었다. 

말년과 음모

계유정난 이후 유배되어 유배지에서 힘겨운 생활을 하였다. 폐위되었을 때 일어난 복귀운동의 여파로 그의 권력에 위협을 느낀 숙부 세조에게 폐위되었다. 강원도 영월로 유배되어 젊은 나이로 결국 살해당하여 죽게 되었다. 세조의 세력들이 그를 비판하고 국가를 망하게 한 인물이라 평가하여 신분이 강등된 채 사망하였다. 따라서 그가 죽은 뒤에도 논란이 많았다. 16세의 어린 나이에 자살하였다고 알고 있지만 실록에 기록된 자료에 의하면 대승이 독약을 바쳤다는 증거가 있다. 의금부를 건립하였고 처형 당시에 영월 주민들의 증언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가 독약을 받은 것은 확실해 보인다. 의금부 도사가 찾아가 아무 말도 하지 못하자 동행했던 사람이 해를 입혔고 이후 살해된 것으로 추정하여 기록되어 있다. 공개적으로 그에 대한 제사는 금기시되었으나 후세에 복원되어 제사를 지내게 되었다. 애달픈 이야기로 추도와 복위를 승인하면서 공식적으로 종묘에 포함되어 선왕들의 신들과 함께 이름을 올리게 되었다. 죽은 이후 가매장되었다가 후에야 봉분을 갖추게 되었고 대대적으로 정비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묘는 오늘날 강원도 영월에 있다. 한양에서 영월까지 따라온 궁녀들이 그가 죽자 강으로 뛰어들어 자살하였다. 다시 복위되자 영을 모시는 사당에 세워졌다는 전설이 전해지기도 한다. 신기하게도 무덤 주변의 소나무들은 절을 하듯 ㄱ자 형태로 그의 묘 방향으로 굽어 있다. 특히 능선 부근에 가면 유독 무덤 쪽의 방향으로 굽어 기울어진 소나무를 발견할 수 있는데 이 소나무를 충성의 소나무라고 부른다. 묘의 특이한 특징 중 하나는 다른 왕릉과 달리 능을 지키는 무인석이 없다는 것이다. 이는 무신들의 힘을 등에 업은 수양대군인 세조가 무력으로 왕위를 찬탈했기 때문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