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종 이도는 오늘날, 한국에서는 그의 업적에 대한 존경을 표하기 위해 대왕으로 부르기도 한다. 역사상 가장 빛나는 시대였다.
생애와 즉위
1408년 12세의 나이로 충녕군에 임명되었고, 아버지인 태종 이방원이 즉위한 지 12년 후인 1412년에는 대군으로 임명되었다. 어릴 때부터 성숙의 기미를 보여 한 번 책을 집어 들면 닳아 없어질 때까지 읽었다고 한다. 단군 이래 최대의 책벌레로 과로로 인해 눈병과 건강 문제를 일으키며 몸이 아파도 책을 읽으려 절대 손에서 놓지 않았다. 이 때문에 건강이 해롭지 않을까 걱정한 태종은 방에 있던 모든 책을 압수했지만 병풍 뒤에 보관해 두었다는 일화도 있다. 조선에서는 왕위를 물려받을 세자가 왕이 되지만 다른 세자들은 왕의 친척에 불과하고 능력을 이용해 정상적인 관직에 오르지 못했다. 재능을 안타깝게 여긴 아버지는 아들의 취미생활의 모든 것을 전적으로 지원하였다. 덕분에 학문, 미술, 음악 다양한 분야를 두루 공부할 수 있었고 제한 없이 공부했기 때문에 여러 분야에서 재능을 키울 수 있었다. 뒤를 이을 세자는 양녕대군이었으나 세자로서의 품위를 손상시키는 일련의 해동과 사건들로 인하여 전통성이 깨지게 되었다. 따라서 좋은 정부를 이루고 운영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한 정치적 안정성과 왕권을 넘겨주려고 하였지만 신하들과 이를 거절하였다. 오랜 기간에 걸친 거듭된 퇴위를 받아들여 경복궁 근정전에서 왕위에 올랐다. 초기에 이방원은 직접 왕으로서 군사적인 그리고 인사적인 권한을 행사하였고 장인 심온을 포함한 외척들을 숙청하였다. 이 시기는 우리 민족 역사상 가장 위대한 유교 정치와 찬란한 문화가 이루어졌던 시대이다. 정치적 안정이 확립되고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전반적인 기반이 확립되었다.
수많은 업적
신분에 상관없이 많은 인재를 임명함으로써 깨끗하고 혁신적인 정치를 추진하였다. 그리고 자신이 인사와 군사에 관한 문제를 직접 처리하면서 기존의 신하들과 새로운 신하들의 조화를 이루어 내었다. 게다가 그는 오례에 따라 유교식으로 국가 행사를 개최하였고 귀족들에게도 유교 윤리를 사회 윤리로 확립하며 장려하였다. 조선은 기본적으로 명나라에 대해 연성정책을 취하여 매년 공물을 바치고 이는 국가 재정에 큰 부담이 되었다. 이미 명나라에 공물 바치는 것을 중단할 것을 요청했지만 개선이 없었다. 더욱이 금과 은을 요구하는 명나라에게 작고 척박한 땅에서 금과 은이 생산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금과 은 조공의 면제를 요청하였다. 말과 비단 그리고 인삼 등을 보내는 조건으로 처녀 조공과 금과 은 조공이 면제되었다. 왜구가 침입하자 마산포를 떠나 그해 군사를 이끌고 오늘날 거제도에서 왜구를 상대로 공격하여 왜구의 근거지인 대마도를 정벌하였다. 또한 중앙집권적인 제도를 운영하기 위한 정책 연구기관으로 궁궐 내에 집현전을 설치하여 일반 관리보다 우대하였다. 당시의 문자인 한자를 백성들이 쉽게 배우지 못하고 한글과 한자가 서로 통하지 않았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을 글로 표현하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하여 28자를 만들었다. 글자의 모음은 음양의 원리를 바탕으로, 자음은 오행의 원리를 바탕으로 만들었다. 훈민정음은 궁궐과 민간에서 사용하다가 20세기에 한글로 발전시켜 한국의 공식 문자로 널리 사용되고 있다. 문무 정책을 실시하고 고위 관리 3명을 임명하여 정부의 주요 업무와 사소한 업무를 도맡게 하였는데 이것이 의정부서사제도의 시행이었다. 신하들에게 명하여 천문 기구 및 해시계, 물시계 등을 제작하였다. 이것은 사람들의 생활과 농업에 직접적인 도움을 주는 과학 기구의 발명으로 이어졌고 이 밖에도 수많은 업적을 남겼다.
말년과 유산
어려서부터 몸이 허약하고 공부에만 몰두하였었는데 젊은 시절 국정을 너무 많이 돌보았고 집권 후반기에 건강이 크게 악화되었다. 자주 여러 가지 질병으로 고통받았고 그로 인해 그는 병상에 누워 국정을 수행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질병 때문에 여러 차례 세자에게 왕위를 넘겨주려고 시도했지만 신하들의 반대로 실패하였다. 학문을 좋아하고 고기를 즐겨 먹었기 때문에 젊은 시절에는 비만이었고 몸집이 컸었지만 노년에 병을 앓아 매우 말랐을 것으로 추정된다. 사냥 외에는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종기, 당뇨, 풍열, 성병의 일종인 임질 등을 앓았다는 의견도 있다. 지나칠 정도로 책을 하도 많이 읽어 시력이 나빠져 지팡이를 의지하여 짚고 다닐 정도로 걷기가 어려웠다고 한다. 그의 재임 기간이 끝날 무렵 상태는 더욱이 악화되었고 임무를 제대로 수행할 수 없었다. 이러한 이유로 자주 온천을 방문하였고 다양한 질병을 치료하기 위해 절을 방문했고 불교의 힘을 빌었다. 소헌왕후가 먼저 사망한 후 건강은 더욱 좋지 않게 되었고 결국 세상을 떠났다. 죽기 전 아들들을 불러서 신하들과 비롯한 여러 사람들의 이간질과 소문에 휘말리지 많고 서로 아끼고 사랑하라는 유언을 당부하며 남겼다. 묘호는 번영을 뜻하며 그것은 나라를 안정시키고 평화로운 시대의 기초를 닦는 의미를 담고 있다. 무덤은 소헌왕후와 같은 고분에 묻혀있는 합장릉이다. 오늘날 경기도 여주에 위치하고 있으며 효종의 무덤과 함께 영령릉을 형성하고 있다. 능은 원래 아버지의 능 근처에 있었으나 풍수지리적으로 불리하다고 여겨 지금의 자리로 옮겨졌다. 이때 목초지였던 구룡산에 비석과 석축비를 그대로 두고 새로 묘를 건축하였다. 오늘날 남긴 수많은 업적 중에는 유네스코로 등록되어 유산으로 남겨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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