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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역사(한국사)

태종 이방원 생애와 즉위, 사회 모습, 말년과 인물 평가

by 한국 역사(한국사) 2024. 4. 8.

태종 이방원 생애와 즉위, 사회 모습, 말년과 인물평가

태종 이방원은 건국 초기의 혼란스러운 상황을 가까스로 해결하고, 새로운 나라 조선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형제들 중 유일하게 문과로서의 자질을 보여 아버지의 부족함을 대신 채워주었다.

생애와 즉위

사실상 제2대 군주로서의 임무를 훌륭하게 수행하여 태종이라는 칭호에 걸맞은 업적을 쌓았다. 다음 찬란한 시대를 열어가기 위해 어떠한 나쁜 일도 마다하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아버지 태조 이성계와 어머니 신의왕후의 다섯 번째 아들로 다른 형제들 중에서도 가장 총명하고 대범하며 냉철한 인물이었다. 조선의 제3대 왕으로 1347년 6월 13일에 태어났으며, 어찌 보면 시조인 아버지보다 왕으로서의 자질을 더 잘 보여주었다. 그는 말이 많고 정직했으며 리더십과 관용, 카리스마가 있었다. 군인 집안 출신으로 정치적 감각과 능력이 제한된 아버지와 달리 군인 집안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17세의 젊은 나이에 과거시험에 합격하였다. 고려에서 관료 생활을 시작하였다. 이러한 점을 보아 이미 뛰어난 지식과 후대의 정치적 능력을 포함하여 왕의 자질을 가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 후, 그는 누구보다 아버지의 혁명을 적극적으로 도왔다. 조선 건국의 길을 연 정몽주의 암살로 시작된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때로 비정함을 느꼈을 것이다. 1398년 의붓어머니 신덕왕후와 형 무안대군의 이복동생이자 후손인 의안대군에 의해 제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났다. 그는 세자를 지지했던 개국공신 정도전과 심효생의 남은 파벌들을 숙청하고 권력을 장악하였다. 이로써 다음 시대를 화려하게 열기 위해 어떤 악행도 마다하지 않는 태도가 이어졌고 이를 통해 조선을 견고한 기반 위에 올려놓을 수 있었다고 한다.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정적들뿐만 아니라 권력에 위협이 된다고 판단되면 그의 권력 상승에 기여한 공무원들과 외척들을 무자비하고 냉정하게 숙청하였다. 이것은 후계자인 세 번째 아들 세종의 훌륭한 통치를 보장하기 위함이었다. 

사회 모습

조선 초기의 혼란을 끝내기 위해 정부의 개혁과 유교 정치를 통해 왕권을 강화하는 데 온 힘을 쏟았다. 사병을 폐지하고 군사력을 통일했으며 의흥부를 폐지하고 군관단의 지휘권을 확인하는 등 군 제도를 개편하여 국방을 강화하였다. 토지와 조세 제도를 개편하여 국가 재정을 안정시켰다. 불교를 폐지하고 사찰을 조직하고 사찰을 몰수하는 정책을 더욱 강화하였다. 권력을 잡은 후 종교 문제에 관여하였다. 신유교를 공부하였지만 새로운 왕조 체제를 위해서 새로운 이념이 필요하다고 판단하여 불교 탄압 정책을 더욱 강화한 것이다. 도교에 대해서도 부정적이었고 승관에 보관된 각종 비선서, 예언서, 무당 관련 서적 등을 불태울 것을 명하였다. 또한 호패법과 서얼금고법을 시행했으며 국방에 집중하고 야만인을 통제하여 국가 기강을 안정시켰다. 사병이 폐지되면서 고려 시대부터 각 지역의 권력자들이 개인적으로 이끌었던 사병 조직이 사라졌고 그들은 농민이 되거나 병역에 편입되었다. 총 4차례에 걸쳐 정부개혁이 실시되었다. 정도전이 설정한 제도의 방향은 권근과 하륜에 의해 수정되어 이 시기에 왕-의정부-육조-언관 제도가 확립되었다. 6조 직계존비속 제도를 통해 의정부와 6조의 관리를 왕에게 직접 예속시켜 정부 업무를 관리하게 하였다. 관리들을 이처럼 잘 통제할 수 있었던 것은 과거에 급제하여 고려 말에 10년간 관리로 근무했기 때문에 관리들의 언행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백성들의 억울한 사정을 듣고, 신문고를 세우고 정적들을 추적하기 위해 수도를 한양으로 다시 옮기는 등 전국적으로 대대적인 개혁을 단행하였다. 왕권을 안정시키고 강화하기 위해 그가 왕위에 오르는데 기여한 사람들을 추방하거나 처형하였다. 

말년과 인물 평가

왕위에 있는 동안 말기에는 큰 가뭄이 있었다. 충청도·전라도·경상도의 논에 금이 가고, 밭에 불이 붙으며 백성들은 풀뿌리를 대신 식량으로 삼았다. 가뭄이 오랫동안 지속이 되자 민심은 날로 비참해졌고 백성들의 삶은 수렁에 빠졌다. 처음에는 각 고을의 군수들에게 민심을 다스리지 못한다고 화를 내었다. 오랜 가뭄으로 곡식이 없고 설상가상으로 이상한 병이 번지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가뭄 때 뙤약볕 아래 앉아 하늘에서 비가 내리길 빌었다. 그 이듬해 아들인 세종과 함께 철원 고석정 부근에서 사냥을 갔다가 노루와 멧돼지를 잡기도 하며 매사냥을 하기도 하였다. 낙천정에서 휴식을 취하기도 하며 생을 보내던 중 보름 넘게 앓던 병으로 애도 속에 5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가뭄이 이어지는 동안 비를 내리기 위해 힘썼고 죽기 직전에도 죽어서 영혼이 되면 이날만은 비를 내리겠다고 말했다. 그 후 기일엔 어김없이 비가 내렸고 사람들은 이 비를 태종비라고 불렀다. 1421년 신하들은 이미 상왕이었던 태종을 태상왕으로 책봉해 줄 것을 요청하였고, 건국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태상왕으로 승진하였다. 마지막 순간 눈물을 흘렸는데 그가 흘린 눈물은 아마도 자신으로 인해 흘린 많은 피에 대한 사죄의 눈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치세 동안의 다양한 제도와 정책의 수립이 이후 조선왕조 운영의 기반이 되었다. 이 점에서 새로운 왕조의 윤곽을 성공적으로 그려낸 왕이라고 할 수 있다. 원경왕후와 함께 광주 서대모산에 묻혔고 쌍둥이 무덤으로 되어 있다. 묘호는 조선왕조를 세운 태조의 공에 버금가는 최고의 영예이다. 사후에 그의 업적을 인정받아 태종이라는 묘호를 받았고 신하들로부터 절대적인 칭송을 받는 영광을 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