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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역사(한국사)

태조 이성계 시대적 상황, 조선 건립과 사건, 말년과 묘호

by 한국 역사(한국사) 2024. 4. 4.

태조 이성계 시대적 상황, 조선 건립과 사건, 말년과 묘호

태조 이성계는 오랜 역사를 가진 한국의 조선왕조의 설립자이자 첫 번째 군주였다. 정립한 건국이념은 조선 500년의 정체성의 토대가 되어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시대적 상황

고려왕조를 무너뜨린 후, 왕위에 올랐고 6년 후 그의 아들들 사이의 싸움에서 퇴위하였다. 훗날 대한제국의 수립 후에 고 황제로 추대되었다. 고려 말부터 홍건적과 왜구의 침략을 물리치는 과정에서 위대한 세력으로 성장하였다. 귀신같은 활쏘기 기술과 뛰어난 추진력과 지도력으로 구국의 영웅이 되었다. 위화도 회군을 계기로 개경으로 돌아와 군사적 권력을 장악하였다. 새로운 고승들의 긍정적인 반응 덕분에 신흥 정치 세력의 토대를 마련하였다. 정몽주가 제거된 지 넉 달 만인 1392년 마침내 정도전 등의 추대로 임금이 되었다. 개경에서 공양왕이 즉위하는 형식으로 왕위에 올라 나라를 열었고, 이듬해 조선이라는 국호를 세우고 수도를 한양으로 옮겼다. 이는 고려의 본거장인 개경을 떠나 고려의 개국을 배제하고 새로운 지배층을 형성하려는 의도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정도전의 도움으로 나라의 기틀을 마련하고 기존의 과거제도를 강화하고 중앙집권국가를 만들었다. 중국 송나라를 기점으로 농업을 국가의 중심 산업으로 만들었고, 분수를 알고 대국을 모시고 주변과 소통하는 성리학이 중심 사상이 되었다. 유학에서 최고의 인물보다는 현자의 두 번째 자리를 택하여 중국에 비해 작은 국가로 안정과 당시 국제정세에서 실리를 추구한 것으로 생각된다. 유교적 세계관에 입각한 정부체제를 구축하기 위해 정부체제를 정비하고 너무도 어려웠던 국가의 공헌을 견제하면서 세계 각국의 인재들과 함께 왕권을 강화하였다. 변화보다 연속성을 강조하였다. 재임 기간 동안 어떠한 새로운 제도도 만들지 않았고 대규모 숙청도 일어나지 않았다. 새로운 왕조는 이전 정권을 위해 일했던 같은 지배 가문과 관리들에 의해 지배되었다. 일본과는 우호적인 관계를 다시 수립하였고 명나라와 관계를 개선하였다.

조선 건립과 사건

고려를 멸망시키고 새로운 나라를 세운 후부터 단 6년 동안 통치하였다. 하늘 아래의 가장 높은 자리에 오르며 영웅적인 삶을 살았다. 말년에는 자식들이 벌인 치열한 권력 투쟁에 직면하여 권력의 공허함과 허무함을 느끼고 왕좌에서 물러났다. 그다음 군주의 자리를 이을 세자를 임명하는 과정에서 실수를 하였고 이방원의 난의 계기를 만들었다. 임금에 오른 것은 정도전을 필두로 한 새로운 급진적인 귀족계급의 힘에 힘입은 바가 컸다. 집안에서는 새로운 나라를 세우는데 큰 공을 세운 두 사람이 있었다. 첫 번째 부인 한씨와 자손인 다섯 번째 아들 이방원과 두 번째 부인 강씨였다. 건국에 공을 세운 사람들에게 공로상이 있듯이 집안의 큰 조력자들에게도 공로상이 있어야 했다. 그것이 바로 다음 자리를 예약하는 차기 왕의 자리였다. 나라를 세우는데 가장 큰 공을 세운 이방원은 그다음 군주의 자리가 당연히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조언자 역할을 한 정도전과 왕위 계승을 위해 부단히 노력한 강씨의 생각은 달랐다. 이렇게 성격이 강한 이방원이 차기 군주가 되는 것은 왕권과 사제권의 조화로운 정치를 추구한 성리학이 깊은 신봉자 정도전에게는 부담이었다. 남편과의 사이에 두 아들을 둔 강씨는 자신의 친아들 중 한 명이 차기 왕이 되기를 강력히 바랐다. 강씨의 막내아들 이방석을 차기 임금으로 추대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왕위가 사라지는 것을 가만히 앉아서 지켜볼 사람이 아니었던 이방원은 곧바로 반기를 들고 태자의 난을 일으켰다. 사병을 일으켜 정도전과 이복형제를 살해하였다. 이성계가 건재한 가운데 벌어진 일이었다.

말년과 묘호

마침내 둘째 아들 이방과에게 자신의 자리를 넘겼다. 자식들의 목숨을 건 왕위를 둘러싼 권력 다툼에 회의적이었던 이성계는 이방원이 오르자 고향 함경도로 가서 돌아오지 않았다. 다섯째 아들 이방원을 몹시 싫어했지만 이미 이방원 쪽으로 기울었던 풍조는 돌아오지 않았다. 이방원은 매번 차사를 보내 이성계를 다시 데려오려 했지만 이방원이 보낸 차사를 모두 죽이고 돌려보내지 않았다. 이때 나온 말이 함흥차사인데 심부름을 간 사람의 소식이 거의 없거나 답장이 거의 오지 않을 때 사용한다. 그 후 조선의 왕사를 지낸 승려인 무학대사의 간곡한 설득으로 한양으로 돌아와 태상왕의 자리에 올랐다. 창덕궁에서 74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그의 묘는 경기도 구리시에 있는 건원릉이며 묘호는 태조이다. 묘호는 임금이 승천하여 공적을 칭송한 후 붙여진 이름으로 조선시대 임금을 가리키는 이름 중 하나이다. 사후 종묘를 방문할 때 붙이는 호를 말하기도 한다. 나라를 세운 왕에게 조라는 이름이 붙고, 다음 왕에게는 종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하지만 후에 나라를 세운 것에 버금가는 업적을 남긴 왕에게 나라를 잘 지쳤다는 의미로 조가 덧붙여졌다. 쉽게 말하면 공이 있으면 조, 덕이 있으면 종이다. 이것을 종법질서라고 한다. 근데 나름의 종법질서가 있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사실 공과 덕을 딱 잘라 말하기 어려워 기준상 애매하기도 하다. 묘호는 다음 임금이 정하는 것이기에 자신의 왕권강화와 정당성 확보를 위해서 선왕의 묘호를 지을 때도 고심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나름의 종법질서가 있었다고 하나 결국 후대의 이해관계에 의해 바뀌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