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종 이방과는 태조 이성계의 둘째 아들로 마음씨가 착하고 용기가 있고 지략이 뛰어났다. 실제로 성품이 온화하고 인자하였지만 전투에 나서서는 어느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담대한 성격도 지니고 있었다.
생애와 즉위
고려 시대 동안 이성계를 따라 북쪽에서 전투를 벌였고 많은 업적들을 이루었다. 실제 장남으로 대접받고 전장에서 함께 있었던 것은 단순히 장남 이방우 다음으로 줄을 잇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형 이방우는 고려의 중심 귀족 가문인 개경 전주이씨의 후계자로서 의미가 컸다. 이에 개경에서 종가 역할을 수행할 때는 동북면의 영토를 관리하고 현장에서 가별초를 이끌 별도의 인물이 필요했다. 그래서 다음 아들로 동북면의 차기 영주이자 가별초의 통수권자로 어려서부터 아버지로부터 군사 훈련을 받고 실전 전투 경험을 쌓았다. 그 결과 가문에 대한 영향력은 둘째 아들에게 상당할 수밖에 없었고 조선의 건국 이후 영안대군으로 임명되었다. 권력을 지향하는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에 왕자의 반란으로 인한 격변을 겪지 않았다. 첫 번째 왕자의 반란의 결과로 세자로 임명되었다. 태조 이성계가 퇴위하여 조선의 두 번째로 왕의 자리에 올랐으나 정치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지위에 있지는 않았다. 또한 태조의 퇴위가 자발적인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뜻에 의해 반강제적으로 이루어진 것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이렇기에 자신의 노력이 아니라 상황에 따라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무력할 수밖에 없었다. 새로운 수도 한양에서 일어난 첫 왕자의 난으로 권력투쟁의 현장이 된 한양을 떠나 옛 수도 개경으로 돌아왔다. 여러모로 고려에 대한 향수가 강했고 형제들이 치열한 싸움을 벌였던 한양을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국경을 넘는 것을 금지하는 법을 제정하였으며, 이것은 관리들과 관리들 사이 의존하는 것을 금지함으로써 힘을 약화시켰다. 이방원의 뜻에 따라 왕실과 관리들이 키운 사병제도가 폐지되고 삼군부에 편입되어 지방권력의 힘이 약화되고 왕권이 강화되었다. 정치적 판단과 결정은 거의 점적으로 그의 동생 이방원의 뜻에 따라 이루어졌다.
두번의 사건
왕위 계승 문제를 놓고 왕자들의 싸움이 있었다. 이성계의 네 번째 아들인 이방간이 주도했다고 해서 방간의 난이라고도 한다. 이방원이 정치적인 권력을 장악하였지만 다른 형제들과 그들의 친척들은 아직도 개인 군대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무시할 수 없는 세력을 유지하였다. 그는 그의 부인에게서 후사가 없었기 때문에 차기왕은 동생들 중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고 그중 가장 영향력이 있는 사람은 이방원이었다. 그러나 이방간도 왕위를 계승하려는 야망이 있었다. 이러한 불안정한 상황에서 이방간에게 이방원이 그다음 왕이 되기 위해 이방간을 죽이려 한다고 거짓으로 보고하였다. 박포는 제1차 왕자의 난을 성공하는 많은 관련이 있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공로를 논하여 상을 행하는 과정에서 일등공신으로 승진할 수 없다고 불평하다가 유배되었었다. 이방간은 박포의 귀띔을 듣고 사병을 동원하였다. 박포는 중립을 지키며 그저 상황을 보기만 하고 있었다. 이방간의 처조카가 이 사실을 이성계에게 알렸고 이성계는 좌의정 우현보에게 알렸다. 우현보는 그의 아들 우흥부에게 알렸고 이에 곧 이방원도 대군을 준비하였다. 양측은 사냥을 핑계로 사병 및 병력을 준비하여 치열한 전투를 통해 이방원은 승리하였다. 이방간이 항복하였고 심문에 이어 박포가 본인을 꾀어 가운데서 병력을 모았다고 자백하였다. 이어 박포는 다시 유배되었고 시간이 지나그곳에서 처형되었다. 두 차례의 왕자의 난은 이방원이 결국엔 왕위를 계승하는 지름길로 계기가 되었다. 난이 해결된 후 그는 동생에게 왕위를 넘겨주었고 상왕으로 임명되었다.
말년과 인물 평가
재임 기간 동안 정무보다 승부 게임과 같은 오락에 더 몰두했고 그의 행동은 이방원을 편안하게 하는 효과를 낳았다. 자신의 자리를 내려놓고 왕위에서 물러난 후 인덕궁에서 살며 여생을 유유히 보냈다. 제사를 지내고 불공을 드리며 이것을 핑계로 전국 각지로 온천 여행을 다녔다. 사냥, 싸움, 연회를 즐기기도 하는 등 동생들과는 좋은 시간을 보냈고 63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그의 무덤은 오늘날 경기도 개성시 개풍군에 있으며 유일하게 제일 북쪽에 무덤이 있다. 아버지를 도와 조선을 건국하면서도 왕위를 탐내지 않고 효도하였다. 동생이 사고를 치면 보호하고, 불임이었던 부인을 끝까지 사랑하였다. 그는 가족애가 강한 사람이었다. 또한 고려 말과 조선 초의 격동기에 장수를 누린 몇 안 되는 인물이기도 하다. 그러나 반강제적으로 임금이 된 탓에 재위 기간 동안 왕 대접을 충분히 받지 못했고, 사후에도 정당성 문제로 제대로 대접을 받지 못하였다. 만약 몇 년 간의 왕의 자리를 더 지켜 많은 업적을 남겼더라면 평가는 전혀 달라지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이렇기에 사망 후 이방과는 묘호 없이 공정왕이라고 불리다가 훗날 숙종 때에 정종이라는 묘호를 받았다. 남들이 평가하기에는 동생의 힘에 짓눌려 고작 짧은 시간 동안에만 왕의 자리를 지켰던 사람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하지만 고려말 이성계를 따라 수많은 업적을 남기고 새로운 조선이라는 나라를 세우는데 공헌을 하였다. 이러한 것들을 비추어 보면 충분히 굳건하게 자신의 자리를 지킬 수 있었던 사람인 것 같다는 평가도 있다. 이것은 평소의 인자하고 온화한 성격과 후사가 없다는 점 그리고 무엇보다 그의 생명을 구하기 위한 불가피한 조치였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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