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제강점기 시대는 일본이 한반도를 강제적으로 점령하여 식민지로 삼은 시기이다. 제1기인 무단 통치, 제2기인 민족 분열 통치(문화 통치), 제3기인 민족 말살 통치로 나뉜다.
초기 움직임
1910년대는 일제가 조선 총독부를 설치하고, 의병 활동을 억누르기 위해 군대를 파견하였고 국내의 저항 세력을 무단으로 통치한 시기이다.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 등의 기본권을 박탈하고 독립운동을 무자비하게 탄압하였다. 또한 헌병 경찰과 헌병 보조원을 전국에 배치하였고 즉결 처분권을 부여하여 한국인을 무자비하게 태형에 처하기도 하였다. 토지조사사업을 공포하여 식민지 수탈을 시작하였다. 회사령을 공포하여 일본 자본 세력의 편의를 봐주었고, 국내의 자본 세력을 억압하였다. 이 시기의 한국인 노동자는 열악한 환경에서 일을 하였고 보수도 말도 안 되게 적었으며, 민족적 차별까지 받으며 혹사도 당하였다. 한편 민족 해방 운동이 어렵게 되자 국내에서 민족 해방 운동가들은 비밀결사형태로 조직되었다. 신민회는 근대 때부터 존재해 왔던 대표적인 비밀결사 항일 운동 단체이다. 안악 사건과 105인 사건을 계기로 결국 해체되고 말았다. 해외에서는 미주 지역과 만주와 연해주 지역 등에서 근거지를 마련하는데 힘을 쏟았다. 특히 토지조사사업으로 토지를 빼앗긴 농민들은 만주와 연해주 일대에 많이 이주하였다. 간도 일대에 한인촌과 연해주 일대에 신한촌 등을 형성하여서 독립운동 기지를 건설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 직후 대규모 민족 해방 운동인 3·1 운동을 전개하였다. 미국 대통령 우드로우 윌슨의 민족 자결주의 발표는 국내의 독립운동가들을 격려하여 더욱 힘을 내도록 하였다. 이는 신한청년당 대표 김규식을 파리 강화 회의에 파견하는 것과 2·8 독립선언과 3·1 운동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3·1 운동 이후 일제는 무단통치만으로는 조선을 효과적으로 지배할 수 없을 것이라는 판단 하에 친일파를 육성하기 위하여 이른바 문화 통치를 시행하였다. 헌병 경찰제를 보통 경찰제로 전환하였지만 오히려 경찰의 수와 장비는 증강되었고 독립운동가를 색출하기 위한 고등경찰제를 도입하기도 하였다.
사회적 모습
무단 통치 시기에 금지하였던 언론 출판의 자유를 일부 허용하여 신문 발행을 허가하였다. 이때에 탄생한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는 후에 한국 사회의 주류 언론으로 성장하였다. 그러나 여전히 통제된 신문에 대한 검열을 통하여 삭제, 정간, 폐간을 자행하였다. 또한 결사의 자유를 일부 허용하여 단체의 설립을 인정하는 듯하였으나 1925년 치안유지법을 제정하여 조선인을 기만하였다. 또 조선인들을 위한 교육의 기회를 늘리겠다고 선전하였다. 일제는 민족의 분열과 이간을 조장하였는데, 민족주의 세력 내에서 실력양성운동을 주장하던 자치론자가 등장하였다. 한편 해외에서는 3.1 운동에서 드러난 조선 민족의 독립의지를 담아 중국의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발족시켰다. 그러나 일제의 방해 공작과 내부의 독림운동 방법론 차이에 따른 분열로 인해 임시정부 주도의 독립운동은 한동안 잠잠해지고 그 세력이 약화되었다. 또한 항일무장단체는 간도와 만주 연해주의 조선 동포들을 기반으로 조직되었다. 계기로 압록강과 두만강을 중심으로 국경 지방에서 치열한 무장투쟁을 벌였다. 특히 김좌진 장군이 이끄는 북로군정서군은 청산리 전투에서 일본군을 물리치는 큰 성과를 이루었다. 국내에는 구월산대, 천마사대 등의 유격활동을 하는 게릴라 부대 등이 존재하였다. 특히 천마산대는 국외의 임시정부와 국내를 연결하는 역할도 하였다. 국내에서는 1926년 천도교 계열과 사회주의자의 연대 계기가 된 6·10 만세 사건과 해외에서 불어온 좌우합작의 분위기로 인해 국내에서도 민족유일당 운동이 전개되었다. 이때에 만들어진 신간회는 일제강점기의 가장 큰 민족단체였다. 1929년 1월부터 3일까지 1년여에 걸쳐 전개된 전라남도 무안군 암태도 소작쟁의 등이 대표적인 투쟁으로 6개월간 계속된 원산 총파업, 1930년 1월 부산조선방직 파업 등이 있다. 특히 대표적인 여성 단체였던 근우회를 자매단체로 두기도 하였고 형평 운동이나 청년 운동 등 국내의 크고 많은 운동들을 지원하기도 하였다. 국내외에서 김원봉이 주도하는 의열단은 일본 요인의 암살, 파괴 활동을 적극적으로 펴나가는 투쟁 활동을 활발히 하였다. 또한, 안재홍과 정인보 외의 인물들은 역사 연구와 유적지 발굴 등을 진행해 나갔다. 장택상 외 인물들은 고미술품등 유물이 해외로 반출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해 노력을 하였다.
수많은 노력
1930년대 초반부터 만주국 수립 이후에는 만주 침략이 본격화되었다. 이에 만주에서의 무장 투쟁이 힘들어지자 지청천과 같은 혁신의회 계열의 한국독립군 인사들은 중국 관내로 이동하기도 하였다. 일제가 이른바 국가총동원령을 내려 조선에 강제 징용으로 한국인 노동력이 착취되었다. 징병제와 학도 지원병 등을 실시하여 수많은 남학생과 젊은이들을 전쟁에 동원하였다. 한편 침체되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독립 활동은 김구를 중심으로 한 단체인 한인 애국단의 활약으로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윤봉길, 이봉창이 중국 국민당 정부의 의거로 지원을 받았고 이는 중일전쟁 이후에 창설된 한국광복군의 발판이 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1930년대의 독립운동의 중심점은 김규식과 김원봉이 주도하는 조선민족혁명당이었으며 산하의 조선의용대 일부 세력과 함께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합류하였다. 한편 일본은 태평양 전쟁을 시작하였다. 전면전 특성상 일본군의 군사력은 부족해졌다. 직전까지 조선의 지식인과 지배층의 상당수가 친일로 돌아섰다. 이 점을 고려하여 어떻게 보면 한국인은 꾸준히 점진적으로 확산되어 오던 영구 병합의 위기에 정면으로 직면하게 되었다. 더욱이 태평양 전쟁의 발발과 함께 물자와 인력을 수출하여 물류 기지로 건설하려고 하였다. 일본의 정책은 한국인을 전에 경험하지 못한 초유의 고통에 빠지게 하였다. 전쟁의 결과가 악화되자 일본은 전쟁 물자 보급에 더욱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일본 제국이 연합군에게 패망함으로써 1945년 종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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