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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역사(한국사)

대한민국 정부 수립 과정 모습, 개요와 위원회 결성, 배경과 혼란

by 한국 역사(한국사) 2024. 4. 1.

대한민국 정부 수립 과정 모습, 개요와 위원회 결성, 배경과 혼란

대한민국 정부 수립으로는 일본의 패망 후 한국과 북한은 그들만의 반정부를 구성하였다. 초대 대통령으로 이승만을, 부통령으로 이시영을 선출하였다. 

과정 모습

일본의 지배를 받던 한국은 해방되었다. 그러나 한국인들의 즉각적인 독립에 대한 열망과는 달리 한반도는 38도선을 따라 분단되었다. 미국과 소련은 전후 세계 전략과 동아시아 정책을 바탕으로 남과 북의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 내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과 소련은 공동동맹국으로서 한반도 문제를 협의하여 해결하고자 하였고 이에 1945년 모스크바 회의가 개최되었다. 이 회의는 전후 문제를 다루기 위해 개최된 것으로 특히 일본과 분리된 지역의 관리와 한국 문제가 논의되었다. 같은 해 12월 모스크바협정이 체결되어 신탁통치, 미국의 공동위원회, 한국에 관한 38선 등의 문제가 논의되었다. 이 안건이 국내에 도입되자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민족총동원위원회가 구성되어 반독점 운동이 전개되었다. 이러한 신탁통치안을 둘러싸고 임시정부는 필사적으로 반대를 주장했다. 박헌영의 조선공산당 등 좌파들은 찬성을 주장해 의견이 엇갈렸다. 그 결과 좌우의 동맹을 통한 민족통일의 작업은 막막해졌다. 이런 가운데 1946년 1월에 미·소공동위원회 예비회담이 열렸고, 3월에 정식위원회가 열리게 되었다. 그러나 회의가 계속되면서 점차 파탄상태에 빠졌고, 이러한 혼란을 극복하기 위한 여러 방안들이 모색되었다. 여러 방안 중 하나는 이승만에 대한 대응으로 한국민주당이 조직한 통일총본부의 자치정부 운동이었다. 정읍성명은 얄타회의와 모스크바 3단계 결의를 취소하였다. 38선에 관한 내용과 신탁통치를 폐지하고 곧바로 남한을 위한 독립적인 과도정부를 수립하라는 내용이었다.

개요와 위원회 결성

정부에선 한편 김구를 필두로 임시정부에 소속되었던 한국독립당은 반독점 운동을 근간으로 국회를 구성하였다. 한편으로는 좌우협력의 실현과 남북통일을 주장하였다. 또한 김규식, 여운형 등 중도우파와 중도좌파 단체들은 좌우협력운동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이들 중도우파 인사들은 1차 정부 이후 부패척결제를 주장하였다. 친정부적 입장에서 미소공동위원회의 재개를 통한 통일 임시정부 수립을 주장하였다. 이와 동시에 좌익 세력은 남한의 정치·경제·사회를 교란하기 위해 다양한 수단을 동원하였다. 정판사 위조사건을 계기로 공산당이 지하화 되었는데 부산의 철도 파업으로 촉발된 대구 폭동이 이들의 대표적인 예이기도 하다. 이 사건 이후 미군정청은 12월 남조선과도입법회를 설립하였다. 제2차 미·소 합동위원회가 열렸는데 이때 냉전이 심화되면서 의견 충돌은 양측의 입장만 확인된 채 완전한 결렬로 이어졌다. 미국은 유엔 주관하에 한국에서 총선을 실시하고 결과가 확정되면 미군과 소련군이 철수할 것과 유엔 한국재건공사를 재안 하였다. 1947년 6월 미군정청은 남조선과도정부로 불렀다. 미국의 조치는 소련뿐만 아니라 영국과 중국의 동의 없이 일방적이었다. 한국 문제의 편입은 사실상 남북한의 두 정부 수립을 의미하였으며, 공동위원회가 두 차례 개최되었다. 신뢰에 맞서 싸운 정당 및 사회단체에 대한 미국과 소련의 태도가 달랐고 회의가 결렬되자 미국의 제안으로 한국 문제가 유엔에 제출되었다. 이후 냉전의 심화로 1947년 10월 완전히 무너졌다. 궁극적으로 유엔총회는 주관으로 한국에서 총선을 실시하기로 결의하고 이에 따라 유엔 한국 임시위원회가 구성되었다. 

배경과 혼란

임시위원회는 서울에서 활동을 시작하였지만 소련군의 입국 거부로 북한에서는 제 기능을 수행할 수 없었다. 찬성과 반대를 결정하는 투표를 통하여 선거가 가능한 지역인 남한에서 선거를 실시할 것을 권고하였다. 미국의 결의안을 압도적인 다수로 통과시켰다. 남한의 독립 선거는 분단국가의 시작을 의미하였다. 1948년 3월 31일 유엔 주관으로 한국에서 총선을 실시하기로 결의하였다. 5월 10일 선거가 가능한 지역인 남한에서 총선을 실시한다는 선언을 발표하였다. 한편 한국에서는 좌파와 우파의 갈등이 날로 심화되었다. 남한의 독립 정부 수립에 반대했던 김구와 김규식은 북한까지 건너가서 남북한 대표 합동 회의를 개최하고자 제안하였지만 결국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한편 총선에 반대하여 발생한 제주도의 4·3 사건이 확대되면서 정부는 공격을 진압하기 위하여 군대를 파견할 것을 명령하였다. 그러나 독립정부 수립과 민족통일 반대를 주장하며 제주도행을 거부하였다. 혁명을 일으켜 인민군을 조직한 반란군은 여수를 해방구로 만든 뒤 주변 지역으로 진격하였다. 정부는 여수를 완전히 탈환하고 육해군의 합동작전으로 반란군을 진압하였다. 정부의 진압 과정에서 여수와 순천 그리고 제주 지역은 수많은 인명과 가옥 피해를 입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미군정의 법률인 선거법에 따라 남한의 독립 총선이 실시되었다. 1948년 8월 15일 미군정청으로부터 정권을 이양받아 공식적으로 수립되었다. 일본의 지배에서 해방된 지 꼭 3년이 되었고, 일제에 의해 국권을 빼앗긴 지 38년이 되었다. 정부 수립일인 8월 15일은 이보다 3년 앞선 1945년 8월 15일 광복 3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정하였다. 서울 종로구 세종로 중앙청사에서는 정부 수립을 위한 국민 경축식이 열렸고,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의 취임과 동시에 제1공화국이 출범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