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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역사(한국사)

19세기 개항 시대 초기 모습, 여러 운동, 사회적 모습

by 한국 역사(한국사) 2024. 3. 26.

19세기 개항 시대 초기 모습, 여러 운동, 사회적 모습

19세기 개항 시대는 후반에서 20세기 초 무렵, 한국이 서구 자본주의 국가의 요구로 문호를 열어 외국과 통상을 시작하는 시기이다.

초기 모습

강화도 조약이 체결된 이후 서양문화가 한국에 유입되면서 시작되었다. 기존 근대 이전의 사회질서와 관습을 타파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나기 시작하면서 근대사회로 변모한 시기를 말하기도 한다. 초기 조선에는 전대를 이어받아 동양적 봉건제의 전제군주 체제가 그대로 표면상으로는 유지되었지만 사회의 여러 현상이 변천되어 분화하고 있었다. 이로 인한 체제상의 파국이 이미 걷잡을 수 없는 사실로 전개되고 있던 시기였다. 이미 오래전부터 수차례 일본은 조선에 무력으로 압력을 가하였다. 마찬가지로 청나라도 지리적으로 인접하여 많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이에 청나라와 일본이 충돌하여 청일전쟁을 하게 되었고 이어 일본은 전쟁에서 모두 승리하자 본격적으로 한국을 일본의 속국 아래에 두려고 하였다. 서구 문명과 자주 접촉하면서 현대 학문의 유입과 교육계의 현대화로 인해 전문적인 통역관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근대 교육을 받기 위한 민간의 노력이 있었기 때문에 사립학교가 많이 설립되었다. 또한 개신교 선교사들이 왕성하게 활동하던 시기였기도 하여 선교사들의 사립학교 설립도 빈번하였다. 1884년 급진계몽파는 입헌군주제를 설정하려고 하였다. 1894년 갑오개혁 때 관공서와 왕실사무가 각각 의정부와 궁내청으로 분리되면서 입헌군주제에 한 발짝 더 다가섰다. 1896년 설립된 독립협회는 자유민권운동을 꾸준히 전개해 왔다. 국호를 바꿔 새롭게 정하였고, 전제군주제의 국가로 고종은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여러 운동 

고종은 산업과 교육을 육성하는 등 개혁과 개방을 추진하는 등 많은 노력을 하였지만 역부족이었다. 대한제국의 정부는 중립 선언을 하게 되고 전후로 하여 민권 운동과 독립협회의 입헌군주제 추진 운동이 활발하였다. 정부 주도의 광무개혁인 근대적 개혁이 실시되었으며, 이 시기에 더욱 많은 서구의 문물과 사상이 유입되었다. 1904년 2월 8일 한반도와 만주의 패권을 둘러싸고 러일 전쟁이 발발했는데, 러시아와 대립하면서 대한제국의 중립을 무시하였다. 일본제국이 대한제국에게 한반도 내에 시설 및 영토 등 군사 및 제반 시설 이용을 적극 협조할 것을 강요하였다. 이러한 내용의 한일의정서를 강제로 체결하였으며 제1차 한일 협약으로 외교, 재정 등 각 분야에 고문을 두고 대한제국의 내정에 간섭하였다. 1905년 일본은 대한제국의 지배를 일본권 안에 완전하게 두게 하기 위해서 러시아와의 포츠머스 조약을 통해 한반도에 영향권을 행사하게 되었다. 이어서 만발의 준비를 마친 일본은 1905년 11월 17일 초대 통감이었던 이토 히로부미가 대한제국에 오게 되었다. 일본은 일방적으로 군사를 이끌고 고종 황제가 있는 궁궐로 몰려와 공포스러운 분위기를 조성하였다. 제2차 한일 협약을 체결하였으며 을사조약이라고도 부르는 이 조약의 성립을 발표하여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강탈하였다. 그 일을 맡을 통감부를 한성에 설치하였다. 이에 사회의 각계각층에서는 일본의 압박 속에서 일본제국의 침략을 규탄하고 여러 불평등 조약들의 폐기를 주장하는 운동이 거세게 일어났다. 1905년 이후에는 대한 자강회와 대한 협회 그리고 신민회 등이 산업과 교육등을 통해 국민의 지식과 실력 등을 키웠다. 침범되고 빼앗긴을 당한 권리를 되찾고 국권을 회복하고 독립을 보전해 가고자 하는 애국 계몽 운동이 전개되었다. 

사회적 모습

대한제국 정부의 각 부처에 일본의 통감이 임명한 일본인 차관을 두었다. 대한제국의 내정에 노골적으로 그리고 직접적으로 집행하는 간섭을 하였으며 이면 협약을 통해 군대를 강제로 해산하였다. 군대 해산에 따라 이에 반발한 군인들이 전국 각지에서 의병과 가담하여 투쟁을 하였는데 이를 정미의병이라 한다. 이 의병 운동의 양상은 의병 전쟁으로 확대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일제는 1909년 7월 12일 기유각서를 통해 대한제국의 경찰권과 사법권을 빼앗았다. 결국 대한제국은 1910년 8월 29일, 한일 병합 조약으로 한국사의 가장 주요한 한 시기가 짓밟히게 되었다. 근대사의 진로가 강제적으로 일본의 특별 행정 구역으로 들어가는 치욕을 겪어야 했으며, 국권을 모두 강탈당하였다. 고종 즉위 원년인 1864년 전후로부터 19세기 후기에는 우연하게도 10년 간격으로 외세와 큰 사건이 겹치게 되었다. 한민족의 독립적인 경제, 정치, 사회, 문화 등 다양한 발전이 저해당하였다. 특히 이 시기는 일제의 침략으로 나라가 어지러운 상황이 되어 일본이 대한제국의 땅에 주류를 이루면서 민족적으로 큰 시련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한국이 근대사회로 진입하는 데 큰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이는 일본의 군선외교뿐만 아니라 조선사회 내에서 성장하고 있던 대외개방의 필요성에 대한 인식의 변화에도 영향을 받았다. 정부 내에서도 조약 체결에 반대하는 여론이 지배적이었고, 소수의 개국 공신들이 일본과의 외교관계 수립을 위한 협상을 주도하였다. 양국 관계가 파국으로 치닫는 것을 막으면서 내부적으로는 조약의 타당성을 설득하였다. 외부적으로는 일본의 무리한 요구를 반박해야 하는 과제에 직면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