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후삼국 시대 신라 말기에 지방의 호족이었던 견훤과 궁예가 각각 나라를 세우면서 시작되었다. 신라에 대한 반란과 백제, 고구려 부흥운동의 결과 형성된 세력들이 존속했던 시기를 일컫는다.
당시 상황
통일 신라 말기에 신라와 후백제, 후고구려가 등장하여 각 나라들이 치열하게 경쟁하면서 3국이 대립하던 시기이기도 하다. 훗날 왕건이 신라와 후백제를 통틀어 통일했던 시기로 약 35년 동안 시대가 지속되어 이어졌다. 이 시기가 펼쳐지게 된 이유에는 신라의 8세기 후반부터 9세기 말기에 들어서 중앙 귀족들의 권력 쟁탈전으로 쇠약해졌다. 사회가 극도로 혼란해지자 지방 통제력이 약화되었던 배경이 있다. 각지에서는 반란이 일어났다. 처음에는 단순한 도적이나 군벌에 불과하던 반란 세력들은 국가 체계를 갖추면서 옛 삼국을 부활시키겠다는 명분을 내걸고 정통성을 세웠다. 지방의 호족들이 자립하기에 이르렀다. 한반도를 지배했던 옛 삼국의 부분적인 부활을 보였다. 통일신라가 단독으로 지배한 후 천천히 쇠퇴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만든 권력의 공백은 몇몇 반항적인 국가들이 일어나 고대 왕국들의 오래된 역사적인 이름들을 취하도록 이끌었다. 900년 지방 세력들이 독자적인 정권을 세웠다. 이 중 농민 지도자이자 신라군 장교인 견훤이 정치적인 불안을 이용하여 영토에 대한 지배권을 확실히 하고, 스스로 무주의 군수가 되었다. 견훤은 야심이 더 많아졌고 입지를 확실히 굳히고자 도적 양길과 힘을 합치면서 한반도의 남서쪽에 있는 옛 백제 왕국의 부활을 만들었다. 지금의 전주인 완산주를 도읍으로 전라도와 충청도 지역을 지배하며 이때 비로소 견훤은 백제왕이라 칭하였다. 또한 견훤은 자신이 세운 나라의 제도와 여러 관직들을 정비하였으며 중국에 사신을 보내어 외교 관계를 맺었다.
쟁탈 전쟁
후백제가 탄생하던 중 한편으로는 귀족의 승려 지도자 궁예는 후고구려로 알려진 서기 901년에 북쪽에 새로운 고구려 국가를 선포하였다. 그 역시 양길과 동맹을 맺었지만 오히려 더 무자비한 모습을 보이며 자신이 왕이라고 선언하였다. 그는 처음에는 지금의 개성 지역에 있는 곳으로 그다음에는 철원으로 수도를 옮겼다. 또한 불안정한 성격을 잘 보여주는 왕국의 이름을 서기 904년에 마진으로 그리고 서기 911년에 태봉으로 바꾸었다. 한반도를 통제하기 위한 장기간의 권력 투쟁이 뒤따랐다. 권력에 취해 자신을 미륵불이라고 믿었고 신정적 전제주의를 추구하였다. 경전을 짓는데 많은 시간을 보냈으며 자신과 그의 가족을 호화로운 예복으로 변장하였고 200명의 승려의 수행원 없이는 어디에도 가지 않았다. 또한 그는 심지어 독심술의 힘이 있다고 주장하였고 그의 기술을 불충의 의도로 의심하는 사람을 조정에서 숙청하는 데 사용하였다. 이는 중앙의 관리나 군인들, 지방 호족들의 반발을 불러왔으며 내분이 깊어졌다. 결국 지방의 세력을 통제하면서 동시에 왕권을 강화하려는 과정에서 민심을 잃었다. 인기 없고 광신적인 횡포는 그의 백성들의 손에 죽음을 이끌게 된 계기가 되었다. 궁예는 918년 왕건과 따르던 장군들이 혁명이라는 정변을 일으켰고 송악 지방의 호족인 왕건에게 왕위에서 쫓겨나 죽고 왕건이 즉위하였다. 왕건은 이미 몇몇 섬들을 점령하고 백제의 중국과 일본과의 무역을 막으면서 수군 지휘관으로 두각을 나타내었다. 왕건은 태봉을 멸망시키고 나라 이름인 국호를 고려로 환원하였다. 뜻은 고구려를 계승한다는 의미였으며, 연호를 천수라고 하였다. 또한 수도를 다시 송악으로 옮겼다. 그 이유는 왕건의 아버지가 오랫동안 부유한 상인이자 지방 수장이었는데 그중심지였기 때문이다.
통일
후백제는 신라의 수도 경주를 약탈하며 공격하였다. 신라는 삼국 중에서 가장 약하고 남쪽의 작은 심장부만 통제하고 있었는데 고려에게 도움을 요청함으로써 대응하였다. 후백제는 이어서 고려에도 공격을 하였는데 귀족 가문과의 연합과 신라와의 외교 관계를 구실로 삼한 왕조의 통치자 자리를 놓고 경쟁하였다. 견훤은 왕건과의 전쟁에서 패배하였다. 후백제의 국내 정세는 잦은 주변 국가들과의 전쟁과 왕위 계승 문제로 나라의 정세가 많이 어지러웠다. 여러 부인들 사이에서 많은 자녀를 두었는데 그 중 차남인 금강에게 왕위를 물려주려고 시도 하였다. 고려와의 전쟁에서 패배하고 돌아왔을 때 아들 신검을 따르는 세력에게 반란에 직면하여 폐위되었다. 금산사에 유폐되어 백제의 정치권은 혼란을 겪었다. 왕건은 경주 외곽의 새로운 수비대를 통해 통제했던 신라의 대부분의 영토를 소유하고 있었다. 실질적인 통치자로서 위치는 932년 중국의 당나라에 의해 인정되었다. 934년 백제에 대한 압도적인 승리 이후로 발해의 북쪽의 피난민들은 고려로 돌아올 수 있을 정도로 상황이 안정적이라고 느꼈다. 936년 고려로 도망친 견훤은 자신의 아들인 견신검을 제거하는 데 도움을 요청하였다. 고려 군대를 이끌고 백제로 공격하였으며 그 결과 내전과 견신검과 견훤의 죽음은 백제를 크게 약화시켰다. 또한 신라의 경순왕은 항복하고 왕건을 신라의 후계자로 지명하였다. 경순왕을 경주의 사심관에 임명하여 신라의 지배층을 흡유·흡수하였다. 통일 후 호족들과 결혼 정책을 통해 사돈 관계를 맺으면서 이들과 연합하였다. 동맹과 내분의 지저분한 시기가 뒤따랐다. 고려 국가는 다시 한번 오늘날의 한국 이름의 기원인 고려라는 이름으로 나라를 다시 한번 통일하여 지배적인 위치를 확립하였다. 왕건은 사후에 고려 태조 혹은 위대한 건국자라는 칭호를 받으며 거의 500년 동안 지속될 통일된 국가와 왕조를 형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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