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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역사(한국사)

발해 시대 건국 배경, 사회 모습, 예술 및 정치

by 한국 역사(한국사) 2024. 3. 24.

 

발해 시대 건국 배경, 사회 모습, 예술 및 정치

발해 시대는 만주 지역에서 고구려 유민들 중심으로 건국하였으며 본 나라를 계승한다는 뜻으로 이름을 지었고 후에 고려에 편입되었다. 당의 영향으로 토대를 바탕으로 독자적으로 확립하였다. 

건국 배경

대조영이 나라를 세웠는데 이때 세워진 시기는 신라가 대동강 이남까지의 영토를 확립하고 남북국의 형세를 형성한 시기이다. 조선 중기까지만 해도 통일신라로 보는 시각이 강했고 이러한 관점은 시간이 지나고 시대가 변화면서도 계속 지속되어 왔었다. 그러나 1970년대 유득공의 발해고, 안정복의 동사강목을 필두로 노론 북학파 계역 일부와 남인 실학파로부터 역시 국사로 편입시키려는 노력이 시도되었다. 일종의 당과 외교관계를 맺는 과정에서 당이 지칭한 호칭에서 유래되었다. 대략 지금의 중국의 일대인데 바다와 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진국 일본의 경우를 보면 알 수 있는데 대외에선 고려라고 사용한 적이 있었다. 거란에서는 모시 구르 혹은 단 구르 라고 불렀었다고 하며, 이 중 단 구르 라는 국명이 동단국의 어원이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제기되고 있다. 오늘날 현대 연구와 얽혀있는 한(남북)국,중국, 일본, 러시아 각 국가들은 자신들의 정치적 이해에 맞는 지도를 채택하는 경황이 있다. 학자들과 다른 역사가들에 따르면 고구려의 지배층에게 봉사하는 노동자 계급을 구성하였다고 한다. 지배 구조는 군사적인 지도자 중심의 관리 구조에 기초했고 또한 부분적으로 중국 체제의 요소들을 채택하였다. 8세기 이후 더 중앙집권화되었고 권력은 왕과 왕실을 중심으로 강화되었다. 건국된 후 당나라의 문화와 정치 제도를 적극적으로 수용하였다. 

사회 모습

사회의 계급 체계는 엄격한 계급 체제가 있었다고 암시한다. 엘리트들은 성을 가지고 대규모 확장된 귀족 가문 계통에 속하는 경향이 있었다. 반대로 평민들은 성이 전혀 없었고, 계급과 신분이 상향적인 사회 이동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문왕의 둘째 딸인 정혜공주묘비에서 황상 이라는 표현과 황후라고 표현한 묘비가 존재하는 것으로 보아 외왕내제였을 것이라는 추측도 있다. 또한, 왕에게 皇(임금 황) 이 들어간 표현을 썼다는 것은 황제와의 비슷한 권위를 가졌을 것이라는 점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씨족 제도로 씨족 지도자의 지위는 씨족의 힘에 달려 있었다. 씨족의 구성원은 충분한 권한을 가지고 있다면 누구나 지도자가 될 수 있었다. 종교적으로 특권을 가진 무속 씨족도 있었다. 씨족의 투쟁은 또한 부분적으로 당의 영향력이 커졌고 더 이상의 중국화에 대한 다른 태도 때문이었다. 사회의 주요 부분은 개인적인 능력에서 자유로운 씨족으로 구성되었다. 이전 세기들보다 특히 북부에서 훨씬 더 널리 농업이 퍼졌고 발달되었다. 밀·보리·콩·쌀이 재배된 주요 작물 유형이었다. 쌀·발효·콩·자두·배와 같은 그 지역의 특화된 농산물들 중 일부가 많이 수요 되었다. 어업과 사냥은 사람들 사이에서 중요하게 남아있었다. 5개의 도읍과 15개의 성, 63개의 현을 가지고 있었다. 궁궐의 안쪽에는 직사각형 벽으로 둘러싸인 주거 공간이 배치되어 있었다. 당시의 다른 동아시아 국가들도 이와 비슷하게 시행하였다. 10개 부대가 중앙군을 구성하였고, 그중 2개 부대인 좌우 맹분위가 정예 부대였다. 각 부대는 왕궁과 수도를 지키거나 궁궐 수비대 역할을 하는 등 각자의 임무를 수행하였다. 그 외 지역은 15개 지방에 군대를 배치하였다. 초기 10만 명의 병력을 보유했다고 알려져 있다. 훌륭한 철과 구리제품, 비단과 리넨 직물, 당의 영향 아래 개발된 도자기도 많이 생산하였다. 높은 수준의 장인정신을 가지고 있었고 인근 국가와 무역에 종사하였다.

예술 및 정치

모피는 대표적인 수출품이었고, 섬유 제품과 금과 수은과 같은 귀금속은 대표적인 수입품이었다. 모피는 귀족들 사이에서 인기가 있었기 때문에 매우 가치가 높았다. 관료제는 3부 6부를 토대로 하여 중국어를 행정의 문자 언어로 사용하였다. 당나라의 조공국이었지만 내부 정책뿐만 아니라 대외 관계에서도 독자적인 길을 걸었다. 스스로를 제국으로 간주하고 독립적인 자격으로 일본과 같은 이웃 국가에 대사를 보내기도 하였다. 문화는 민족 구성만큼이나 복잡하다. 고고학적인 발견들은 문화가 당 중국 문화뿐만 아니라 고구려 등 북쪽 지역의 문화 요소들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였다. 그러나 일본, 중국, 러시아 그리고 한국의 학자들은 그들의 국가적 배경 때문에 다른 요소들보다 일부 요소들을 강조한다. 인구는 옛 고구려인들과 만주의 유목민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정착지로 확인된 60개 지역 내에 많은 사람들이 난방용 난로, 도자기 기와, 그릇 등을 갖춘 주거지를 가지고 있었다. 철제 농기구들은 일부 지역에서 정교한 농업이 이루어졌음을 시사한다. 이러한 발견들은 수도 이외의 지역에서도 인구의 많은 부분이 앉아서 생활했음을 나타낸다. 왕궁에서 온돌 난방 시스템을 사용한 것과 고구려의 지배층이 사용한 돌덧널무덤, 석실, 석관을 사용한 것 등 고구려의 많은 전통에 의해 이어졌다고 믿고 있다. 일본에 파견한 사절단 중에 고구려의 전형적인 성씨인 고씨의 성을 가진 자가 많았다. 이 점을 고려하여 보면 문화에서 고구려의 상당한 존재를 나타냄을 알 수 있다. 진나라의 기록에는 그 나라 사람들이 주로 무술을 연마하고 유교 규범을 따르지 않는 것을 묘사할 수 있다. 여성들은 엄청나게 질투심이 많았다고 묘사되었고, 남성들은 용기가 다른 국가들을 능가하는 교활함으로 가득 차 있다고 묘사되었다. 일부 사람들은 불교를 믿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