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야(가야 연맹) 시대는 한국 남부 낙동강 유역의 정치국가의 연맹체였던 곳이다. 개별정치에는 작은 도시국가로 분류된 요소가 있다.
정치와 경제
아마도 한국 단어를 한자로 표기하는 부정확함과 아직 이 당시에 한자가 완전히 정착되지 않은 시기였기 때문인지 표기가 고정되지 않았다. 사료에는 가락·가라·가량·구야를 포함한 다양한 이름이 사용되었다. 후대의 언어로는 한족의 언어에 속했을 가능성이 높다. 13세기 삼국유사에 기록된 전설에 따르면 왕이 되겠다는 메시지와 함께 여섯 개의 알이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한다. 그들 중 한 명인 김수로가 금관가야의 왕이 되었고, 나머지 다섯 명은 대가야·성산가야·아라가야·고령가야·소가야의 나머지 다섯 가야를 세웠다. 정치는 삼한 연합의 하나인 고대 변한 연합의 12개 부족의 주요 정치적 구조로부터 발전하였다. 느슨하게 조직된 족장들은 금관가야를 중심으로 여섯 개의 그룹으로 나뉘었다. 고고학 자료와 제한된 기록에 근거하여 학자들은 3세기 후반을 군사 활동의 증가와 장례 풍습의 변화에 주목하였다. 변한에서 가야로의 과도기로 파악하였다. 이러한 과도기는 또한 일부 대가야를 포함한 공국의 이전 엘리트들이 부여 왕국의 요소들에 의해 대체되는 것과 관련이 있다. 이는 더 군국주의적인 이념과 통치 방식을 가져왔다. 지류 하천 계곡의 충적평야와 낙동 하구에 위치하였다. 특히 낙동 하구는 비옥한 평야와 바다로 바로 접근할 수 있고 철광이 풍부하였다. 정치는 농업·어업·주물업·장거리 무역을 기반으로 하는 경제를 가지고 있었다. 특히 제철업으로 유명하였다. 백제와 일본 등 주변 국가에 철광석·철갑·기타 무기류를 대량으로 수출하였다. 대체로 상업적이고 비정치적인 변한의 관계와 달리 가야의 정치는 그 왕국들과 강한 정치적 유대 관계를 유지하려고 시도한 것으로 보인다.
집과 토기
김수로가 건국한 후 5세기까지에는 기와집이 없었다. 실제로 초기 주거지는 초가가 대부분이었다. 왕들 또한 초가집에 살다 보니 평민들의 주거지는 그다지 발달하지 못하였다. 땅을 파고 지붕만 있고 벽은 없이 사는 구덩이에 살기도 하였으며, 기둥으로 키운 고층 주택을 짓고 살았던 것으로 추정한다. 이처럼 바닥이 떠 있는 고층 주택은 땅에서 수분이 올라오거나 뱀 등 동물의 피해를 막을 수 있는 장점이 있었다. 실제로 이 지역에서는 고층 창고 건물 모양의 집 모양 토기가 출토되어 당시 시기의 건축 형태를 짐작할 수 있다. 이 집 모양의 토기들은 대부분 큰 굴뚝이 달려 있어서 내부에 취사와 난방을 위한 소방시설을 갖추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지붕 모양은 대부분 박공지붕으로 오늘날과 비슷하다. 그런데 후기에 이르러서는 기와가 본격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오늘의 김해와 고령 지역에서는 기와가 발견되었고 특히 고령군에서 대가야 만리장성이 발견되면서 동시에 기와가 대량으로 출토되었다. 초석과 주춧돌도 일부 조사되어 인접국가인 백제와 신라에 크게 뒤지지 않을 정도로 발전하였음을 볼 수 있다. 토기에 남아있는 음식물을 통해 유추할 수 있다. 무덤을 닫고 외부 공기와 단절시켰을 때 이 음식물들은 완전히 썩지 않고 수천 년이 지난 지금까지 보존되고 있다. 사람들이 해산물을 즐겼음을 짐작할 수 있으며 파악하기는 어렵지만 오늘날 낙동강에 여전히 서식하고 있는 어종들이었을 것이라 추측할 수 있다. 닭뼈와 조개껍질 등이 발견되었고 당시 소나 돼지 등 고기를 별로 즐기지 못하였음도 예상할 수 있다. 종교는 처음에 고대 한반도의 독특한 신앙을 믿었다. 사후 세계에서 무덤 주인이 자신을 따를 사람과 함께 묻히는 의식이 고구려·백제·신라보다 더 자주 행해졌기 때문에 사후 세계를 중요하게 여겼던 것으로 추정한다.
몰락
금관가야 건국 이야기에서 김수로왕 때부터 불교를 전래했다고 묘사되었다. 신화적인 기록이고 초기 유적에서 불교가 전래되었는지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이 많다. 그러나 적어도 후기에는 불교가 전래되어 널리 신앙으로 된 것으로 본다. 오늘날 경상북도 고령군 지역의 고아리 벽화 묘의 천장에 그려진 불교의 상징인 연꽃무늬는 지금도 남아 있다. 전통적으로 고구려와 신라에 대항하였던 반대로 일본과 백제와는 좋은 관계를 누렸다. 기록에 따르면 일본과의 관계에서는 기술적인 진보와 문화적인 발전을, 백제와의 관계에서는 정기적인 군사의 지원을 받았었다. 2~3세기에 여러 가야국들은 현대 김해의 금관가야 중심지로 연맹을 형성하였다. 쇠퇴기를 거쳐 5~6세기경에 대가야를 중심으로 연맹이 부활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이웃 나라 신라의 침략과 공격에 맞서 방어할 수 없었다. 결국 모든 가야 연맹은 신라에 흡수되었다. 몰락 이후, 패배한 왕실을 포함하여 연합국의 많은 귀족들과 엘리트들은 신라의 골계에 통합되었다. 그러한 예 중 하나는 훗날 삼국통일에 중요한 역할을 했었던 신라의 장군 김유신이다. 김유신은 금관가야의 마지막 통치자인 왕의 증손자였다. 김유신은 두번째로 높은 골계의 지위를 얻게 되었는데 이는 김해 김씨가 금관가야의 왕실이 경주 김씨와 혼례를 치렀기 때문이기도 하다. 역사는 동시대의 주변 국가들에 비해 간략하게 기술되어 있다. 독자적인 기록이 없고 북쪽 지역으로 영역을 진출한 적이 극히 드물다는 등 이러한 이유로 유적과 유물이 부족하여 연구에 어려움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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