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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역사(한국사)

백제 시대 설립 배경, 생활 모습, 문화 유추

by 한국 역사(한국사) 2024. 3. 22.

한국 역사(한국사)의 백제 시대

백제 시대의 건국 설화는 신화적인 요소를 찾아보기 힘들다. 설화는 신기하고 기이한 일들이 기록되어 있어 실제와는 거리가 멀게 생각한다. 사실을 기반으로 구성되어 그 속에 숨은 의미를 통해 실제 모습을 일부 그려볼 수 있다.

설립 배경

기초 사료의 신뢰성으로 인해 연구자들 사이에 팽팽한 선을 그리고 있다. 연속성을 인정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으며 초기 기록과 관련하여 절충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여러 가지 건국 설화 중 대표적으로 삼국사기 기록에 따라 비류와 온조를 시조로 인정하는 설로 이어진다. 지금의 인천 지역 일대에 잡은 비류는 나라를 세웠고, 지금의 서울 지역 일대에 정착한 온조는 나라를 세웠다. 이후 비류는 얼마 못 가 온조에게 합류했으며, 비류가 죽자 오늘날 백제가 되었다. 부여에서 이주하여 나라를 건국하였다고 하더라도 인구의 주축이 토착이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산업기반은 농업이었으며 무엇을 주로 경작하였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기록을 검토해 보면 쌀·보리·조·콩 등과 같은 오곡을 주로 농사를 시작하였다. 이후 제직, 염색 등의 수공업이 발달하였고 무기, 불상 등의 금속공업도 가능하게 되었다. 왕토사상이 원칙이고 토지의 측량방법은 두락제를 썼다. 조세는 조를 쌀로, 세는 포목 또는 비단실과 쌀을 내었고 재앙에 따라 차등을 두었다. 무역항으로는 영암성이 번성하였다. 경제력이 풍부한 편이었다. 인천 지역은 바닷가라서 그런지 어업은 굉장히 발달했지만 토지에 염분이 많아 국가의 근간이 되는 농업과 축산업이 부실했다. 반면 서울 지역은 드넓은 강남 평야를 통해 농업과 축산업 등이 풍부하게 발전될 수 있었다. 한강을 끼고 있어서 어업도 어느 정도 발달되었기 때문이다. 넓어진 영토를 다스리기 위하여 군사 및 행정 조직을 정비하였는데, 관직에 따라 등급을 매기고 옷의 색깔로 구분하였다. 16개의 관등으로 관리를 서열화하였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또한 중앙권화를 시도한 성왕 때에 이르러 수도와 지방을 각각 5부와 5방으로 나누었으며, 각 방에는 방령이라고 하는 지방관을 파견하였다. 주요 관리직을 선출하는 전통이 남아 있고 3년마다 각 관서의 장이 교체되었다.

생활 모습

일반 백성의 15세 이상은 어른으로 분류되어 매년 각종 세금을 내어야 했으며, 또한 병역과 부역에도 종사해야만 했다. 세금은 그 집의 생활 정도에 따라 차등을 두었으며, 남자와 여자 사이에도 역시 내용상의 차이가 있었다. 형벌은 엄격하여 반역자나 전쟁터에서 도주, 퇴각한 군사 및 살인범은 참수에 처했다. 도둑은 귀양을 보냄과 동시에 훔친 물건은 2배의 값을 치러서 배상하게 하였다. 그리고 관리가 뇌물을 받거나 횡령을 했을 때는 3배의 값을 치러서 배상하고 종신형에 처하였다. 범죄에 대한 형벌로서 노예가 된 사람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중에 귀족층은 중국의 고전과 역사책을 즐겨 읽었고 한문을 능숙하게 구사했으며 관청의 세무에도 밝았다. 문화는 최근 들어 아름답고 화려하게 전해지기도 한다. 강한 인상과 유적의 집중이 다른 시대에 비길 수 없고 아껴둔 문화자원이라고도 할 수 있다. 격조 있는 조화를 보이는 기와무늬와 절제된 단순미를 보이는 목조건물로 연상하게 하는 탑의 기법을 예로 볼 수 있다. 건축물을 보아도 불교 미술이 발달한 것을 알 수 있다. 인간의 종교적으로 주요한 토대를 이루는 것으로 보인다. 장례의 양식은 독특한 측면을 가지고 있었다. 시신을 한 번 임시 매장했다가 일정 시간이 지나면 파내어 뼈를 깨끗이 씻고 장례 의식을 치른 뒤 다시 매장하는 의복의 형태였다. 죽음을 경계로 생과 사를 인식하는 태도에 개념으로 사후에 영혼이 머무는 장소에 초점을 맞추었다. 또한, 이승에서의 생활을 사후에도 계속한다는 연속적 인식을 내포하는 개념이기도 하다. 외교적으로는 백제라는 이름이 각인되었고 당당히 성장하여 전성기를 열었다.

문화 유추

능산리 고분에는 연화문(연꽃무늬), 운문(구름무늬), 사신도를 그린 벽화가 있으며 송산리 고분이 있다. 후기부터 양나라를 비롯한 남조의 여러 나라로부터 문화를 전수받았다. 공물을 보내어 문화를 받아들여 불경, 모시박사, 공장, 화가 등을 요청하였다. 이렇게 받아들인 종교와 문화는 일본에 전파되어 문화의 태동에 영향을 주었다. 음악은 어느 정도 수준이 높았던 것으로 보인다. 참고로 대표 문화재인 금동대향로를 들여다보면 5인의 악사가 연주하는 모습이 새겨져 있는데 이를 통해 악기 모습을 유추해 볼 수 있다. 토기는 온화한 느낌을 주며 섬세한 기교로 뒷마무리까지도 완벽하게 정리하고 다듬어졌다는 의견도 있다. 부여와 고구려의 문화 요소를 모두 발견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대다수의 연구자들은 굳이 어느 한쪽을 계승하였다고 가리기보다는 다소 모호하긴 하지만 부여와 고구려 방면이라는 표현을 하였다. 문화는 보편적이고 특수하며 다양하고 개방적인 측면에서 다른 국가의 문화보다 훨씬 높이 평가 된다. 당시 사방에서 압박하던 신라 때문에 당나라에 대한 외교가 실패하자 신라와 직접 군사적 대결을 시도하여 전쟁을 하였다. 이후 신라는 공격하고 한강 지역을 장악하면서 주도권을 갖게 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멸망 이유는 다양한 방면의 상황에 깊이 연관되어 있다. 내부적으로는 권력 다툼과 외부적으로는 나당 연합의 압력에 직면하여 사회적으로 불안정성을 겪었다. 이러한 내외부적인 요인들로 인하여 쇠퇴와 멸망을 야기시켰다. 멸망은 단순히 한 국가의 종말이 아니라 한반도 역사의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