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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역사(한국사)

남한산성 간략한 줄거리, 역사적 비교, 병자호란 이후

by 한국 역사(한국사) 2024. 5. 29.

남한산성 간략한 줄거리, 역사적 비교, 병자호란 이후

남한산성은 황동혁 감독이 작가 김훈의 동명 소설을 참고하여 만든 작품이다.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에 투옥된 인조가 청나라에 항복하기까지의 과정을 그렸다. 

간략한 줄거리

병자호란 때인 1636년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피신했다가 청군에게 사방이 포위되어 고립된 처지에 놓였다. 식량이 풍부하지 않아 겨우 근근이 두 달 정도밖에 버틸 수 없다. 청에 대한 저항으로 50일을 조금 넘긴 상황에서  대신들의 의견은 극명하게 갈린다. 조선의 현감 최명길은 수모를 당하더라도 투항해 백성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대로 현감 김상헌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맞서 싸워야 한다고 주장한다. 한편 압박은 점점 더 심해진다. 결국 주화파와 척화파의 갈등으로 고민하는 왕과 자신의 신의대로 충성을 따르려는 신하. 전쟁으로 고통받는 백성 등 다양한 인간군상이 그려진다. 2016년 11월부터 제작을 시작하여 2017년 4월까지 촬영을 이어갔다. 총제작비는 약 150억 원이었다. 소설에 충실한 작품을 만들기 위해 황동혁 감독은 액션 사극이나 퓨전 사극 스타일을 배제하고 정통 사극의 분위기와 함께 인물과 이야기에 집중했다. 화면 구성과 음악도 절제된 느낌을 주었다. 작품을 통해 인물들과 그들의 간절함, 서민들의 활력과 노력을 보여주고 싶다고 말했다. 그래서 이 결말은 인조의 굴욕적인 광경이 아니라 망치 소리와 봄 풍경으로 뛰어드는 힘찬 아이들의 모습이었다고 한다. 추석 연휴 기간과 맞물리면서 개봉 이틀 만에 관객 수 100만 명을 돌파했고 개봉 4일 만에 200만 명을 넘겼다. 그러나 명절 이후 관객 수 증가세가 줄어들어 손익분기점을 500만 명에 미치지 못했다. 상업적으로도 실패한 것으로 평가된다. 작가 김훈은 보고 난 후 본인이 쓴 소설의 목적을 설명하였다. 이 세상을 지배하는 악과 이에 맞서 저항하고 신음하며 짓밟힌 채 앞을 내다볼 수밖에 없는 고난과 애환을 묘사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한다. 자신의 의도를 잘 녹여 담아낸 것 같다고 덧붙였다. 전반적으로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역사적 비교

역사적 사건을 소재로 하고 있지만 진실이 아니라 허구로 상상력이 더해졌기 때문에 사실과는 다르게 묘사되는 부분이 있다. 예를 들어 김상헌은 인조가 청나라에 항복했을 때 자신의 배를 찔러 자살하려는 것으로 그려졌다. 실제로는 교수형으로 자살을 시도했지만 실패해 82세까지 오랫동안 살았다. 이것은 감독의 의도였다고 볼 수 있다. 전략적 거점으로서 중요성은 조선 태조 때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요동을 방문한 이자영의 보고를 토대로 명나라가 침략할 수도 있다는 위기감이 고조되었다. 국경과 내륙을 가리지 않고 성곽을 쌓고 기존의 것을 수정하여 중심부의 방어를 강화했다. 이에 대한 체계적인 구축에 나섰다. 이러한 국방정책에 따라 세종 때부터 군사시설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임진왜란 때 류성룡이 전략기지로 활용하는 것을 주장하면서 다시 제기됐지만 실제 건설은 광해군 때에 시작되었다. 그러나 그 완성을 눈에 띄기도 전에 폐위되어 지금과 같은 형태로 확장되었다. 반정으로 광해군은 물러나고 여당은 교체되면서 대외정책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서인이 집권하자 친명세책을 취했다. 후진의 침입 위험이 커졌고 이괄의 난을 계기로 수도를 방어하는 곳이자 비상시 피신할 수 있는 곳으로 그 중요성이 크게 높아졌다. 2년간 공사를 추진하여 완료된 후에 광주목을 옮겼고 같은 해 수어청을 설치했다.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병자호란의 수치를 피할 수 없었다. 정묘전쟁 이후 후금이 조선에 무리한 요구에 저항하는 움직임을 보이자 태자를 보내 사과를 요구했다. 그러나 이를 거부했고 그래서 12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침략했다. 이에 먼저 봉림대군과 인평대군 등 강화도로 피신시켰다. 전국에서 구호군을 파견했으나 도착하기도 전에 모두 궤멸당했다. 결국 함락되고 자녀들과 신하들 200여 명이 포로로 잡히면서 대세는 기울었다. 그 뒤 포를 쏘며 강하게 압박하여 일부가 무너졌다.

병자호란 이후

그 결과 더 이상 버틸 힘을 잃었고 성문을 열고 나가 삼전도에서 항복한 사례가 이어졌다. 인조는 소복을 입고 청나라 황제를 향해 삼궤구고두를 하였다. 이는 여진족의 의식으로 세번 절하고 아홉 번 고개를 숙여 죄를 고백하는 의례였다. 피가 나도록 머리를 땅에 찧어 조아리는 굴욕을 맛본 후 큰 변화가 있었다. 홍이포와 같은 공성무기의 위력을 실감했고 소총과 포를 주 무기로 하였다. 궁수와 창검을 보조무기로 하는 체제로 전환했다. 이에 따라 봉암의 외성과 포탑, 돈대, 옹성을 확장하고 문루와 장대를 쌓았다. 무너진 벽을 보수하고 원래의 모습으로 확장과 재건하면서 남쪽 3곳에 새로 담을 쌓고 4곳에 포탑을 설치했다. 숙종 때 윤지선과 오시복이 축조를 건의했다. 대포를 쏘는 공격의 요새 방향은 정확히 한봉 정상을 향하도록 설치했고 방어를 강화하기 위해 장경사의 원형 부분에도 쌓았다. 이후 수축공사가 많이 이루어졌고 정조에는 기화를 벽돌로 교체하였다. 말기에 의용군 활동으로 역사에 다시 등장한다. 명성황후 암살 사건 이후 봉기한 의병들 중 경기 의병들은 이천의 의병들과 연합하여 이곳을 점령했다. 이후 한양을 침공하기 위한 준비가 이루어졌지만 관군에 체포된 김귀성이라는 사람이 관군에게 서쪽 지역에 피해가 있다고 보고했다. 관군을 이 피해 지역으로 밀고 들어와 이들을 해산시키고 장악하였다. 현재는 옛 정취를 간직한 채 연간 280만 명이 찾는 등 서울과 경기 시민들의 자연휴양지로 자리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