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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역사(한국사)

고종 이희 정치 방법, 재위 후반, 퇴위 이유

by 한국 역사(한국사) 2024. 5. 3.

고종 이희 정치 방법, 재위 후반, 퇴위 이유

고종 이희는 한성부 안국방 운현궁 사저에서 흥선대원군의 차남인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상당히 비범한 모습을 갖추었다고 한다.

정치 방법

정조의 증손자 헌종이 후손 없이 죽자 직계존비속의 혈통이 끊어지면서 임금의 자리는 철종에게 넘어갔다. 그런데 철종도 후계자 없이 죽자 호적상으로는 6촌인 흥선군의 아들들로 계승권이 좁혀졌다. 익종의 부인 신정왕후를 자주 찾아가 친분을 쌓았고 양자로 입양하는 조건으로 동의를 얻었다. 대비 조씨는 그에게 군호를 주고 왕으로 즉위시켰다. 당시 겨우 11살로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대리청정을 했고 흥성군은 대원군이 되어 권력을 잡았다. 역사상 친부가 살아남아 통치하는 전례 없는 사건이 일어났다. 흥선대원군의 섭정을 지낸 후 자신의 통치를 시작하였다. 강화도조약으로 개항하고 내부개혁과 개화운동이 전개되었으나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으로 나라가 혼란에 빠졌다. 동학농민운동으로 중일전쟁이 발발하였고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명성황후를 암살하는 을미사변을 일으키자 러시아대사관이 파견되었다. 신변에 불안을 느끼고 있던 상황에서 거처를 옮겼다. 궁을 오가며 도시정비사업을 지시하였다. 이에 동림문 건설을 추진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기존의 도로 체계 대신 새로운 방사형 도로, 순환형 도로, 전용 도로 등이 개설되고 정비되었다. 또한 궁 앞에는 민중들이 집회를 열 수 있는 광장을 마련하였다. 그는 덕수궁으로 다시 돌아와 대한제국으로 수립을 선포하고 시대명을 광무로 명명하였으며 초대 황제로 즉위하였다. 광무개혁을 단행하고 신군부를 설치하며 이범윤을 간도행정관으로 파견하여 근대 상공업을 진흥시켰다. 공장과 은행 그리고 기업을 설립하고 발전소를 건설하였으며 전등을 켜고 전화선을 설치하며 철도를 개통하였다. 신교육을 추진하고 유학생을 파견하며 전국적인 토지조사를 실시하고 모든 관리에게 양복을 입도록 하였다. 단발령을 복직시키는 등 근대개혁을 실시하였다.

재위 후반

일본의 침략에 대비하여 정보기관 익문사를 설치하고 육해군의 창설준비를 명령하였다. 군의 창설과 관련하여 칙령을 내려 징병제를 실시하였다. 서양의 징병제와 5계급 체제를 절충하는 군제 개혁을 계획하고 이에 따른 협조를 요청하였다. 병력을 동원하여 시위를 벌였고 용산에 군화기 제조공장을 설립하였다. 군대의 창설과 이와 관련된 일련의 성과는 계획에 없던 것이거나 한일조약 이후 그 성과가 해체된 것이다. 일본군은 군대를 풀어 한양 내의 주변 번화가를 장악하고 군대의 해체를 명령하였고 해산되었다. 일본이 러시아와 전쟁을 벌이게 되면 한국의 한양이 침탈될 것을 예감하고 러시아에게 동맹을 요청하는 친서를 보냈지만 거절당하였다. 대외 중립을 선언했지만 서울을 점령한 압력으로 한일의정서 체결로 중립을 지킬 수 있었다. 한일협정을 제시하며 조약 체결을 강제로 요구하였다. 일본 대사는 본인의 국가에 지원군을 받아 궁궐 주변에 물샐틈없는 보안망을 구축하고 이를 포위하여 수립하였다. 그러나 통감부의 끈질긴 압력에도 불구하고 그는 조약을 승인하지 않았다. 대사인은 이에 전략을 바꾸어 정부 각료들을 협박하고 뇌물을 주기 시작하였다. 통감부는 동시에 모든 각료와 원로 대신들을 숙소로 불러 조약 체결에 동의하도록 설득하고 강압적인 태도를 반복하였다. 그런 회유와 강압 끝에 다수의 지지를 얻은 통감부는 마침내 회의를 열어 결정을 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협정이 체결이 되었고 이로 인해 국내에서는 반발이 일어났다. 원한을 품은 러시아 통역가는 그가 커피 애호가라는 점을 이용하여 독극물을 탄 커피를 대접하였다. 극히 이상하다고 판단하여 마시지 않고 땅에 부었다. 하지만 이 커피를 마신 아들 순종은 어린 나이에 의치를 해야 하는 등 치아를 모두 잃고 심각한 후유증을 겪었다.

퇴위 이유

조약에 반대하여 의병 운동이 전국 각지에서 전개되었다. 이 반대 운동으로 힘을 얻고 조약을 무효로 선언하였다. 협정 체결의 부당성을 국제사회에 알리려 하였으나 당시 국제정세의 논리로 효력이 없었다.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개최된 만국평화회의에 이준, 이상설, 이위종 등을 포함한 특사단을 파견하여 부당성을 호소하였다. 이 사건으로 고종은 강제 퇴위를 당하였고 퇴위자가 불참하는 기묘한 퇴위식이 열렸다. 그리고 이후에 한국의 군대는 강제 해산이 되었다. 비밀조직이 왕정복고를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였다. 그는 덕수궁 함녕전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공식적인 사인으로는 뇌출혈이나 심장마비로 인한 자연사이다. 그의 불의의 독살설은 빠르게 퍼졌다. 무관 출신의 한 신하는 독살당하였다고 확신하였다. 하지만 아직 정확한 사인은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사회적인 화제가 되었고 훗날 여러 독립 운동의 불씨가 되었다. 평가로는 강대국에 둘러싸여 내정보다는 외교에 치중해 국력을 확립하지 못한 비운의 군주로 묘사하였다. 새로운 국가의 출범을 기대하고 개혁을 추진하기 시작한 시점에서 객관성이 결여되어 있음을 인정하고 있다. 인품은 칠절하고 상냥하고 인자하다고 묘사하였다. 진정으로 나라의 복지와 진보를 열망하였다고도 한다. 교육 수준은 한자와 한글에 능통하며 자신도 나라의 역사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신하들이 잘 알지 못하는 전통에 대하여 물어보면 직접 찾아보고 답하였다고 한다. 직무에 매우 부지런하고 정치적 성향 또한 호의적이며 진보적이었다. 다른 국가들과 달리 서양에 대한 적대적인 생각에 깊이 빠져 있지 않고 매우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몇 년 동안 진보적인 방향은 물질적으로 이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