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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역사(한국사)

순조 이공 왕위 계승, 재위 후반, 인물 평가

by 한국 역사(한국사) 2024. 4. 27.

순조 이공 왕위 계승, 재위 후반, 인물 평가

순조 이공은 아버지인 정조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 그는 11살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역사상 두 번째 이른 나이에 한 나라의 임금으로 오른 사람이 되었다.

왕위 계승

게다가 그는 장남이었기 때문에 세자로서 가장 짧은 시간을 보낸 왕이기도 하다.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즉위함과 동시에 대왕대비의 모후로서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실시하였다. 수렴청정 기간에 천주교에 큰 박해를 가하였고 그의 배우자까지 반역죄로 처형하였고 이때 이미 몰락하여 얼마 남지 않은 남인은 나락으로 떨어졌다. 노론파도 타격을 입었고 일관적으로 강압적인 태도를 보였지만 나이와 혈통 면에서 압도적인 우위에 있었다. 정치적인 판단력이 뛰어났고 재위 초반에는 영조와 정조의 스타일과 최대한 유사하게 균형 있게 유지하였다. 노론파 숙청에 앞장서는 등 상당히 야심이 있었고 부지런히 업무에 임하였다. 놀랍게도 노비 신분을 폐지하라는 명령을 내리는 등 어느 정도 평등한 면이 있었다. 치세는 어려운 시기에서 시작되었다. 한 왕에게 너무 많은 권력이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를 조금이라도 관리하지 않으면 문제가 발생하였다. 그러나 관리를 포기하고 권력가들에게 통제권이 넘어감으로써 조선 정계는 몇 집안 간의 은밀한 싸움과 부패가 만연하게 발생하였다. 권력가들의 차별과 수탈에 시달리던 농민들의 반란이 일어났고 화산의 폭발과 오랜 가뭄으로 대기근이 들어 이로 인하여 인구가 줄어들게 되었다. 큰 충격을 받고 우유부단함과 무력함을 보이며 탕평이 실패하고 정치가 약화되었다. 국정의 대부분을 비변사에 맡겨 권력가 집안이 마음대로 국정을 이용할 수 있도록 하였다. 안동 김씨 집안은 유력한 대신들을 통해 간접적으로 통치할 수 있었다. 개인적인 물품의 거래가 늘고 부유층 농민의 수가 증가하면서 지주들과 결탁하여 쌀값의 시중 가격을 조작하였다. 쌀은 농민의 주식이고 생존과 직결된 문제이기 때문에 쌀값 상승은 이미 사회적으로 큰 문제로 대두되었다. 권력정치 시기에 권력의 핵심 기관으로 부상하면서 정부는 혼란스러워졌으며 백성들의 삶은 더욱 피폐해졌다.

재위 후반

아들 효명세자는 영리하여 날카로운 일처리로 무너진 조정의 기강을 바로 잡아 신하들과 순조의 기대를 높였다. 이 모습을 보고 신하들 앞에서 자신을 무능한 군주로 자처하여 세자에게 자리를 넘겨줄 것을 여러 차례 선언하였다.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퇴위나 대리 청정 요구가 있을 때면 대부분 온 나라가 발칵 뒤집혀 이를 철회하라는 절절한 반대를 외친다는 점이다. 그러나 세자에게 대리 청정 명령을 내리자 신하들은 모두 무한한 복이라고 하며 목이 마르게 칭찬을 하였다고 한다. 선대에 대리 정부를 격렬히 반대하다가 죽은 홍인한을 크게 의식해서였는지 아니면 대신들이 정말 통치 의지가 없음을 알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여러 면에서 아버지와 증조부에 비해 통치욕이 컸던 인물이 아니었고 오히려 물러나 휴식을 취하고 싶었던 것으로 보인다. 유독 궁궐의 화재가 많이 있었다. 자신의 뒤를 이어 나라를 잘 이끌어 갈 것이라 안심하였던 불과 2년 뒤 효명세자는 병에 걸려 요절하였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두 딸도 이로 인해 사망하였다. 그 충격 때문인지 다리의 종기가 있었는데 상태가 더욱 악화되었고 다시 업무를 보게 되었다. 말년에는 위축된 상태에서 태도는 초기때와 변함이 없었고 권력은 약한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얼굴에 미소가 사라지고 자식들의 연이은 죽음으로 기존의 지병이 악화된 후 소화불량 등 각종 질병에 시달리다 오랜 병으로 마침내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사실 이전에도 병으로 건강이 좋지 않았고 한의학자들은 종합적으로 증세가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유전으로 화병 때문이라고 보고 있다. 이 때문에 왕위는 장손이자 효명세자의 아들인 헌종이 물려 이어받게 되었다. 묘는 서울시 서초구에 위치하고 있다.

인물 평가

무력한 정조의 어린 아들이라는 이미지와 병환으로 존재감이 매우 희미하였다. 연구가 거듭될수록 약한 의지로 조선의 멸망을 앞당긴 어두운 임금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더욱이 통치자들 뒤에 수성의 통치자라는 위치에 있었다는 점에서 그의 무력함에 대한 부정적 의미는 더욱 커졌다. 증조할머니를 포함하여 전임자들로부터 물려받은 강력한 권력을 가지고 있었으나 훈련 기간이 없을 정도로 어린 나이에 즉위하였다. 융합과 자신의 능력으로 이를 극복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결국 청소년기를 지나며 급격히 쇠약해졌다. 따라서 아들인 효명세자에게 희망을 걸었지만 세자 역시 건강이 좋지 않고 짧은 생을 보냈기 때문에 사실상 국정을 도외시하였다. 그리고 이것은 궁극적으로 조선을 지배했던 권력 정치를 낳았으며 또한 30년 이상을 통치했던 이전의 군주들과의 경우와 비교되었다. 공통점은 똑똑한 세자들은 모두 젊은 나이에 사망하였고 왕실은 담보 혈통을 떠나 짧은 생을 보낸 젊은 후계자를 두었다. 또한 말년에 대리청정을 통해 왕위를 물려주었다는 것이다. 그를 대신할 새로운 세력을 갖지 못하였다. 벽파는 박해를 통해 천주교 신자들과 함께 남인을 즉시 몰아냈지만 그들의 지지자이기도 했던 정선왕후가 죽었다. 정권을 장악하자 막말로 비난을 받고 몰락하였다. 재위와 수명이 길었지만 권력정치에 휘말려 이렇다 할 흔적을 남기지 못한 왕이었기에 조선의 임금들 사이에서는 인기가 매우 낮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