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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역사(한국사)

순종 이척 생애와 여러번의 위기, 재위와 후기, 사망과 기록

by 한국 역사(한국사) 2024. 5. 4.

순종 이척 생애와 여러번의 위기, 재위와 후기, 사망과 기록

순종 이척은 대한제국의 두 번째 황제이자 조선의 27대로 약 3년간 한 나라를 통치했 황제이다. 현재 한국 역사상 마지막 군주이다. 그는 비운의 인물이었다.

생애와 여러번의 위기

중전 민씨의 왕족 자녀 중에서 유일하게 일찍 죽지 않고 자라났다. 이전 시대 세자들과 비슷하게 다섯 살 때부터 읽기를 배우기 시작해 성균관에 입학하여 공부했다. 회고에 따르면 수천 개의 한자를 알았지만 뜻을 알고 쓰기보다는 받아쓰기만 잘했을 뿐 사물과 이름을 연결하는 기억력이 남달랐다. 훌륭한 독자였으며 기억력이 뛰어나 다른 가문의 족보를 외웠다고 기록되어 있다. 고종의 많은 자녀 중에서 유일하게 정저의 합법적인 아들이었다. 대한제국에서 금지옥엽이었지만 건강이 그다지 좋지 않았다고 한다.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후계자인 아들의 건강을 염려하여 무속에 의존하여 국가 예산을 낭비하게 만들기도 하였다. 성인이 된 후 독살미수를 겪게 되어 가뜩이나 좋지 않았던 건강이 더욱 악화되었다. 러시아 통역 김홍륙은 함께 커피를 마시던 시시기에 맞춰 아편을 첨가하여 독살하려 하였다. 커피  애호가였던 그는 무심코 다량으로 복용하였고 그 자리에서 피를 토하고 기절했다고 한다. 며칠 동안 혈변을 보는 등 건강에 큰 어려움을 겪었고 어린 나이에 치아가 많이 빠져 의치를 해야 했다. 더욱이 의치를 착용한 탓에 하복부가 커지고 어리숙해 보였는데 이 일로 바보가 됐다는 소문이 전국에 퍼지게 되었다. 전국적인 지위는 그저 허황된 칭호에 불과하게 되었고 인기와 신뢰를 잃었다. 퇴위 음모를 경험하고 예법과 존칭에 관한 사항은 목소리만 낼뿐 정무에 관한 의견은 전혀 밝히지 않는 등 소극적으로 행동하였다. 암살 사건의 부작용 때문인지 직계 후손이 없었다. 이것이 사실인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당시에 그가 몸에 이상이 있어 자손을 볼 수 없다는 말이 널리 퍼져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무능력했다는 이론에는 확고한 근거가 없고 어머니의 지나친 간섭과 우려로 심인성 무능력이 의심된다. 

재위와 후기

궁인들의 증언에 의하면 그는 식사를 즐긴 것과는 달리 특별히 좋아하는 음식이 없었다고 한다. 수라를 대접할 때도 거의 손을 대지 않고 물에 적신 밥만 먹었다고 하여 수라간에 있던 궁인들은 기진맥진했다. 치아가 좋지 않고 딱딱한 음식을 먹기 어려워 무를 삶아서 깍두기처럼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대신들의 극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궁궐을 개방한 최초의 황제였다. 창경궁과 그곳에 보관되어 있던 유물들이 처음으로 대중에게 공개되었고 최초로 하나의 박물관으로 인정받았다. 일본에 의해 고종이 헤이그에 밀사를 보낸 사실이 발각되었고 이에 분노하여 빌미로 협박하여 퇴위를 강요하였다. 국사를 황태자에게 맡기는 칙령을 내렸고 이를 틈타 그의 즉위식을 밀어붙이고 강행하였다. 그러나 비록 황제에 불과했지만 모든 실권은 이완용과 송병준에게 있었고 이 두 사람의 주도로 주권을 넘겨야 하는 과제는 착실히 진행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점에 반발하여 두 군주는 모두 퇴위식에 참석하지 않았다. 신원이 확인되지 않은 두 사람이 그 자리를 차지하여 의례적인 콩트가 벌어졌다. 즉위한 해에 이미 어른이 된 동생 의친왕을 뒤로하고 23살 아래의 둘째 동생 영친왕을 세자로 책봉하였다. 실록에 따르면 여인왕은 이복동생이지 아들이 아니기 때문에 신하들은 세자가 아닌 황태제로 불러야 한다고 말했다. 한편 그가 즉위한 뒤 경술국치의 조선에서 배신자로 취급받던 사람들을 사면하여 복위시키고 새로운 사호와 관직을 부여하는 작업이 활발히 진행되었다. 이 자체가 배신자적 행위가 아니라 어차피 나라가 망해가는 상황에서 의미가 없는 단순한 사람들의 신분 정화 사업에 가까웠다. 실제로 나라가 멸망 위기에 처하자 각지에서 의용군 활동과 기술 훈련 운동이 벌어졌지만 국권을 찬탈하려는 야욕을 막을 수 없었다. 끝없는 압박에 속수무책으로 국권을 하나씩 넘겼고 마침내 황제에게 병합을 청원하였고 대한제국은 막을 내렸다.

사망과 기록

나라를 잃은 뒤에는 주로 창덕궁에 머물며 당구를 즐겼는데 어느 날은 넘어져 당구조차 칠 수 없게 되었다. 그는 장례 때 양복이나 왜색 옷을 입은 조문객이 오면 등을 돌리고 절을 하지 않자 좌중을 경악하게 하였다. 일본 고관들까지 한복을 입고 조문을 왔다는 증언도 있었다. 결국 52세의 나이로 후계자가 없이 세상을 떠났고 자리는 영친왕에게 전해졌다. 죽기 전에 남긴 유언장이 있었는데 궁궐 내부 관리인 조정구가 그에게 명하도록 한 것인데 이 유언장은 미국의 재미교포 신문인 신한민보에 실렸다. 주요 내용은 한일병합조약 체결은 강요로 이루어졌고 본인도 이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의 무덤은 경기도 남양주에 위치하였다. 그가 마지막 군주였다는 이유만으로 나라를 망친 책임을 그에게 전가하는 것은 무리일 것이다. 말 그대로 잘못된 시대에 태어났으며 옳고 그름을 가름할 수 있는 나이였던 무렵 이미 미래는 암울한 상태였다. 선대에게 나라를 망친 책임을 묻는다면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었다. 외교 청원, 외국 단체와의 접촉, 국내 반외세와의 접촉, 해외 도피 시도, 심지어 죽음을 통한 저항도 결국 같은 결과이다. 모든 것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지켜보며 자랐다. 독살 미수의 희생자였고 이미 아무런 힘도 없는 허수아비에 불과하였다. 여러 사건의 후유증으로 몸이 크게 쇠약해졌는데 이로 인해 건강이 좋지 않고 힘도 부족했던 것으로 보인다. 평생 시달렸는데 이것이 자신감이 부족했던 것이 아니냐는 추측이 나오고 있다. 그려진 영정과 흑백사진이 봉안되었다가 모두 불에 탄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별도로 소장된 자료를 바탕으로 일부가 복원되었다. 선대들과 달리 선명한 자료가 남아 있어 다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