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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역사(한국사)

철종 이변 출생과 재위, 시대적 정치, 군주로서의 평가

by 한국 역사(한국사) 2024. 4. 30.

철종 이변 출생과 재위, 시대적 정치, 군주로서의 평가

철종 이변은 한성부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은언과 상계군 사건과 이복형 원경의 옥고로 교동도와 강화도로 유배된 후 왕실의 명예를 박탈당하고 평민처럼 지냈다. 그 후 농부와 나무꾼으로 살다가 순원왕후의 명으로 덕완군에 봉해졌다가 숙부 순조의 양자로 왕위를 계승하였다.

출생과 재위

할아버지 때 부터 시작된 강화도 유배가 풀려나자 한성에 와서 살면서 자랐지만 두 번의 난이 일어났다. 음모 사건에 연루된 혐의로 곧 강화도로 이주하여 일족은 왕실의 지위를 누리지 못하였다. 집안은 새로 부임한 강화부의 감시를 받으며 주민들로부터 멸시를 당하였다. 강화부의 수장으로 임명된 특정 유수가 방어와 보호를 목적으로 집안을 감시하는 것을 집안사람들이 너무 가혹하게 느꼈다고 한다. 하지만 왕위에 오른 철종은 유수를 승원승지에 임명하였다. 또한 자신이 살던 동리의 고집불통 남자가 술에 취해 집 밖에서 오만한 말과 모욕을 하며 소란을 피웠다. 그렇지만 그는 왕위에 오른 뒤에도 이 점에 대하여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다고 한다. 아버지와 이복형제는 역모자라 직위조차 없었다. 정예군에 증직된 뒤 대원군이 되는 형식으로 왕위 계승자로 책봉된 뒤에야 직위를 받았다. 아버지 때에 농사를 지었기 때문에 강화도령이라고 조롱하는 사람도 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알고 지내던 강화 출신의 문인 양명학자 이시원의 인격을 존중하여 중요 관직에 임용하였다. 하지만 조선시대 최고 권력집안이었던 안동김씨파의 권력투쟁으로 진정한 정치를 펼치지 못하였다. 조카 헌종이 후사 없이 젊은 나이로 사망하자 순조의 왕비의 부름을 받고 입궁하여 왕이 되었다. 그러나 조선의 왕위 계승이라는 기본적인 관례마저 무시한 처사였다. 철종은 선천적으로 약하고 우둔하였다. 더구나 안동 김씨 세력에 휘둘려 단 한 사람의 관리직을 등용하는데도 스스로 결정하지 못하였다. 할아버지, 아버지, 본인도 서자 출신이었고 전통성을 이어받지 못한 채 왕이 되었기 때문에 재위기간 중에 조롱을 받아야 했다.

시대적 정치

즉위 직후 실권은 사실상 특권 계층에 손에 있었다. 순조, 헌종, 철종 세명의 왕들의 중전은 모두 안동 김씨에서 나오게 되었다. 이러한 정치는 계속되었다. 학문적 지식이 부족하여 사무는 세도 가문에서 처리하였는데 자신도 이를 알고 술과 궁녀들을 가까이하면서 조정의 일을 제대로 챙기지 않았다. 인맥을 통해 관직의 자리에 오른 시골 관리는 한성에 들어와서도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앞에서 자신이 대장으로 임명되었다고 오만하게 자랑했다는 일화가 있다. 관리들에 의한 부패를 지적하며 비교적 정치에 적극적이었다. 제주도 과거시험에 합격한 사람들이 육로로 먼 길을 돌아가지 않도록 하였다. 제주도에서 받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승원의 관리가 제주도에 파견되어 증명서, 교지, 아사화를 제공하였다. 조정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훈련국의 마보군과 벽기군의 군대를 이용하여 궁궐을 강화하고자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의지를 제대로 관철할 수 없었다. 세도정부의 폐지로 기존의 조선 통치체제가 붕괴되고 삼종정부의 문란은 더욱 심해져 백성들의 생활은 녹초가 되었다. 농민항쟁으로 통칭되는 반란을 시작으로 각지에서 농민 봉기가 무수히 많이 일어났다. 그는 봉기가 발생한 지역의 지도자와 관리들을 처벌하여 기강을 무너뜨렸다. 농민들의 요구를 일부 수용하여 민심을 조율하고자 하였다. 잠시 반란이 수그러들자 삼종관을 설치하여 삼정의 개혁을 공포하고 지배층과 관료들로부터 개혁 방안을 모집하였다. 이때 발표된 삼종 정책은 주로 삼정의 무질서한 개선에 초점을 두었다. 각종 부가세를 폐지하고 과표제를 폐지하였다. 토지세를 전환하여 세제 개혁을 한다는 원칙을 포함하고 있었다. 그러나 구체적인 후속 조치가 없는 상황에서 지배층의 이해관계가 얽혀 정책을 실시할 수 없었다. 

군주로서의 평가

초기에는 궁중 연회를 즐겼으며, 첩과 궁인들과 만찬을 즐겼다고 한다. 술을 마시는 중 뻐꾸기 소리가 나기만 하면 뛰쳐나와 눈물을 흘리기 일쑤였다고 한다. 본래 몸이 쇠약하였으며, 세속 정치에서 뜻대로 관철할 수 없음을 깨닫게 되었고 시간이 지나면서 건강은 점점 악화되었다. 병석에 거의 누워있거나 근근히 진료를 받으며 생명을 유지하였다. 후계자 없이 사망하였고 이 때문에 대신들은 서둘러 모여 후계자를 선정하였다. 그 후계자는 훗날 고종이었다. 묘호의 뜻은 지혜롭고 찬란하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는 대비가 뚜렷한 군주이다. 조선의 임금들 중에서 지배층의 삶과 고통을 가장 잘 알고 공감했기 때문에 백성들에게 동정심을 가졌던 것도 사실이다. 몰락하는 조선을 살리기 위해 여러 방면에서 노력을 기울인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외가와 처가를 통해 정치적 기반을 갖추고 세도 가문을 견제하며 독자적인 왕권을 구축했던 선왕과는 달랐다. 방계 왕실 출신인 그는 정치적 기반이 없었기 때문에 개혁은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기본적으로 자신의 정통성이 매우 약했기 때문에 권력가들에게 의지하여 정책을 추진해야 하는 커다란 조건을 가지고 있었다. 왕의 능력에 따라 충분히 정치계를 통제할 수 있었다고 주장한다. 실질적으로 군림하는 권력가들의 모습은 선왕들에 비해 역량 면에서 열세였음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볼 수 있다. 더구나 집권 말기를 향해 필사적으로 문란을 일삼고 정계를 은퇴한 것은 명백히 암흑시대의 징후였다. 왕으로 더 이상 할 일이 없을 때는 지나치게 가혹한 잣대를 들이댔다는 주장도 있다. 군주로서 할 수 있는 일이 극히 제한적인 세상에서 이분법적인 평가를 내리는 것은 무리일 뿐만 아니라 학문적으로도 큰 의미가 없다. 오히려 극도로 약한 권력 기반을 가지고도 개혁을 시도했다는 점을 어느 정도 감안할 필요가 있다.